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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마지막을 아름답게'

문학n천국 2022. 3. 8. 00:39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16

[16] 마지막을 아름답게

며칠 전 이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던 이어령 교수께서 89세를 일기로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분이 남긴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는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을 고백한 자전적 글이다. 그는 이 땅에 많은 울림을 남기고 갔다. 그분의 큰 아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승무 교수는 아버지의 임종 전 마지막 30분을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는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걸 본 듯 했고, 어찌 보면 황홀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뚫어져라 한 곳을 바라보셨기에 나도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30분 동안이었다.”

죽음이 두려운 장면이 아닌 황홀하다고 표현할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것을 이어령 교수님은 보여주고 가신 것이다. 목사로서 이 장면을 해석하건대 이어령 교수께서는 천국 문이 열린 것을 보시고, 빛난 옷을 입은 천사가 교수님을 천국으로 안내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셨으리라 믿는다.

그렇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피해야 할 순간도 아니다. 죽음은 황홀한 경험이다.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기쁜 첫 걸음이다. 우리는 죽음이 황홀한 경험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 경험이기 때문이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누가복음 16:19-31절에는 두 사람의 죽음을 소개하고 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한 사람은 거지 나사로인데 이들의 나중이 어떠했는지 비유로 보여주고 있다.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고운 베옷을 입었다. 요즘 말로 명품 옷으로 치장한 사람이다. 부자는 자주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다. 이 사람의 삶이 선했는지, 악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시각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가 먹다 남은 음식을 얻기 위해 몸을 대문에 의지한 채 기대어 있었다.

성경은 두 사람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시하지 않기에 현재 상황과 나중 상황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부자는 건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건강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상처가 헐었는데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고름투성이가 되었다.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개들이 고름을 핥아 먹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나사로는 균에 의한 감염이 심해져 죽고 말았다. 개들이 핥았으니 빠르게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부자도 죽었다. 그런데 전쟁 같은 삶을 살았던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고, 호의호식하며 인생의 낙을 누리던 부자는 결국 마지막 심판을 거쳐 지옥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부자니까 지옥에 갔거나, 거지여서 천국에 간 것은 아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천국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나사로가 있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소리쳐 간청한다. 나사로의 손 끝에 물을 조금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서로 건너갈 수 없다고 했다.

(눅16: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 지옥의 고통을 설명하고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그들에게 사람이 간다고 해서 그들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면서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고, 부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지옥에 들어갔다는 결론이 된다. 부자로 사는 게 잘못은 아니다. 가난한 것도 죄는 아니다. 다만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쫓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욥은 동방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겸손했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욥29:12,15-16)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만약 부자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가르침을 기쁨으로 청종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이고, 나사로가 대문 앞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하지도 않았을거라 생각한다.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금방 알아 보았던 것은 나사로가 자기 집 대문에 기대어 구걸했던 것도, 죽었던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돕는 이' 이다. 나사로는 어쩌면 질병 때문에 구걸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경험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거지라고 천대 받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브라함의 품, 곧 주님의 품에서 안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나사로 같은 인생을 우리는 피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삶보다는 오히려 욥처럼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주고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삶을 꿈꿔야 한다. 그런 사람의 마지막이 아름답지 않을까? 황홀하지 않을까?

또한 야곱처럼 자녀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49:28,33)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부자는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 주었지만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당해야 했다. 하지만 나사로는 세상에서 멸시 받았고 유산도 없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가 머문 자리가 아름답고,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예수 믿은 흔적이 확실히 남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잘 살다 왔노라고 고백하고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얼마만큼 누릴까를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 앞에 설 것인가를 늘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