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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단순하게 믿자'

문학n천국 2022. 3. 15. 22:11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18

[18] 단순하게 믿자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급속도로 부흥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은밀하게 부르짖던 120명의 성도에서 대략 2 만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했다. 교회가 부흥하자 교회의 전임 사역자들의 숫자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12명의 사도 외에 구제와 봉사를 전담할 일꾼들을 세웠는데 그들이 일곱 안수집사이다. 이 일곱 집사 가운데 오늘날까지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이들은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이다.

스데반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이다(행7:60). 사도 가운데 첫 순교자는 야고보 사도이다(행12:2). 스데반은 공회에 붙잡혀 와서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설교했다. 기독교를 대적하는 유대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그는 오히려 행복했다.
(행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그 자체였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토록 이 사람을 자긍심으로 '똘똘 뭉치게(close ranks)' 하는게 무엇일까? 예수라는 사람일까?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끝까지 다 들은 것은 기독교인들을 움직이는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 아닐까?

스데반의 설교가 끝나자 유대인들은 벌떼처럼 달려 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서 죽였다. 돌에 맞아 죽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럼에도 스데반은 힘을 내어 무릎을 꿇고 주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숨을 거둔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따라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기도이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길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신앙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행위이다.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다. 이런 믿음의 용사는 마귀도 어찌할 수 없다.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보통 사람들은 사소한 부족함 때문에 주님께 억지를 부리지만, 교회는 스데반 집사 같은 사람들에 의해 명맥이 계속되는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핍박이 찾아왔다. 사도 외에는 모든 성도가 뿔뿔이 흩어졌다. 하루 아침에 당시 권력에 의해 교회가 폐쇄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가 될 게 뻔한데 왜 주님께서는 큰 핍박을 허락하셨을까?
(행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렇게 교회에 닥친 핍박을 인해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성도들은 이미 영적 군사가 되어 있었다.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쫓기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추적자들에게 자기 위치를 노출하는 것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라도 한 듯 복음을 전했다.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사건이다. 교회교육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비용도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위기 상황에서 요동치는 교회를 붙들어 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칠 때 그 태풍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유대교 열성당원 청년 사울이다. 이 사람이 훗날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긋는 사도바울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 그는 교회 핍박자였다. 이 사울에 의해 많은 성도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유대교를 배반하고 이단 예수교에 빠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청년 사울이 핍박자로 종횡무진할 때 성도들의 복음전도 또한 왕성했다. 특히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지역에 엄청난 부흥을 일으켰다. 빌립을 통해 치유와 측사가 많이 나타났다.
(행8:7-8)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매우 싫어하던 지역이다.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인들의 땅이기 때문이었다. 북이스라엘이 B.C.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멸망하고 나서 앗수르왕은 사마리아인들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이주시켜 살게 했다. 결국 문화와 종교도 섞이게 되고 서로 혼인을 함으로써 혼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매우 저주스럽게 여기던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았다. 성경은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유케 하는 복음이 육신의 치유를 넘어 그들의 영혼까지 만져 주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사도행전 8장을 해석할 때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아 핍박을 통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다고 해석한다. 물론 합당한 지적이고, 복음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흩어지게 하심은 저주가 아니라 부흥을 위한 창조적인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집과 재산과 터전을 버리고 옮겨 다니는 것이니 고단하고 수고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치있는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들은 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무가 뿌리 째 뽑히듯 우리 삶의 자리가 옮겨지는 경우도 있다.

아브라함의 경우 70년 넘게 살아온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그 나이에 뭔가 확실한 보장이 없으면 움직이기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시할 땅, 곧 나중에 알게 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구체적인 청사진은 보여 주시지 않았다. 이것은 가족들에게도 혼란이었을 것이고, 평생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던 사람들에게도 혼란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왜? 어디로 가는가? 앞으로의 계획은? 이 모든 질문에 아브라함과 가족들은 답을 줄 수 없었다. 이웃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을 축복해 줘야 하는데 불안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가족들은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나아갈 뿐이었다. 이것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성공 비결이 아닐까? 구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추상적인 약속만 있지만 그래도 그 약속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핍박 때문에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지시받은 것도 아니지만, 발 길 닿는 곳에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복 받을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반대로 구체적인 것을 보여 주어야만 움직이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겠다며 하나님을 윽박지르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좀 무식한 설명이 될 수 있겠지만 가라 하시면 가면 된다. 멈추라 하시면 멈추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잔머리 굴릴 필요가 없다. 가장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복되게 하는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