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20
[20] 진실, 어디까지?
예루살렘교회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일명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다(행5장). 이들은 부부이고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던 가정이었다. 당시 성도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했다. 심지어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여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기도 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우리나라도 1997년 IMF 외환 위기 사태 이듬해인 1998년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며 아나바다 운동을 펼쳤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는 전 국민 캠페인이었다. 이 운동은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했고, 벼룩시장이라는 형태로 지금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나니아는 구약시대에 흔한 이름인 ‘하나냐’와 같은 이름인데, 그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이다. 그리고 삽비라는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여성들이 좋아하는 보석인 '사파이어'가 삽비라와 같은 말이다.
아마도 이들 부부는 은혜를 경험했고 보석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유대 사회에서의 이름은 삶을 해석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개명한 것은 하나님이셨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이들의 섬김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모범이 될 만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부부도 자극을 받았던지 자기들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하에 먼저 얼마를 떼어놓고 그 나머지를 헌금했다. 이 부부에게 성도들의 칭찬이 있었을 것이다. 본받아 할 가정으로 다른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판단을 피할 수는 없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그들을 책망했다.
(행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당황했을 것이다. 땅 값 일부를 감춘 것이 드러난 것에 당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돈을 감추지 않았고 이것 뿐이라고 베드로에게 거짓으로 대답했다. 성도들 앞에서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거짓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행5: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결국 이들 부부는 책망하는 베드로 앞에서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고 말았다. 이들 부부는 세 시간 간격으로 죽었고 당일에 땅에 묻혔다. 이들 부부의 그간의 헌신과 섬김은 성령을 속인 죄 곧, 돈을 감추고 거짓말한 죄 때문에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들 부부에게는 성령을 속인 사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었다.
그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구원받아 천국에 갔을까? 아니면 지옥에 갔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나 목회자들은 그들이 비록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고 책망받아 죽긴 했지만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았을거라 말한다. 신앙을 배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변화되어 주님 앞에 헌신을 했기에 이미 구원 받은 자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의 평생의 신앙생활에 있어 옥에 티였다.
사실 우리 가운데 헌금을 떼 먹거나 금액을 임의로 조정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특히 주일학교 때는 헌금 일부를 사탕이나 간식과 맞바꾸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 부부가 지금 천국에 있느냐, 지옥에 있느냐가 아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까지 진실할 수 있는가? 이다. 내 체면이 구겨지더라도 진실을 붙잡을 수 있느냐?, 아니면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하기에 약간의 하얀 거짓말은 괜챦다고 여기는가? 이다.
요나 선지자는 불순종의 아이콘(icon)이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 삯을 지불하고 도망치고 있었다. 이렇게 사명을 팽개치고 도망치는 요나를 멈춰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큰 풍랑을 일으키셨다.
선장과 사공들은 급기야 배에 실려 있던 모든 짐을 바다에 버려야 했다. 그리고 각자 자기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풍랑이 잠잠케 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잠을 자고 있었다.
화가 난 선원들은 요나에게 하나님께 간구하라며 다그친다. 그리고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풍랑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 해명을 요구했다. 요나는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이 이 재앙의 원인이 맞다며 솔직하게 인정한다. 자칫하면 바다에 던져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나를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께서 풍랑을 멈추실 것이라며 바다에 던져지길 원했다. 선원들은 어쩔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그랬더니 요나의 말처럼 바다가 곧 잔잔해졌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가 목숨을 초개(草芥) 처럼 버릴 수 있을까? 요나가 욕을 많이 먹는 선지자이긴 하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것 만큼은 대단히 싫어했던 것 같다. 만약 요나가 끝까지 내가 풍랑의 원인이 아니라고, 나는 결백하다고 우겼다면 어찌 되었을까? 누가 증명해 낼 수 있을까? 사실 제비뽑기는 비과학적이다. 많은 선원들의 목숨은 어찌 되었을까? 결국 풍랑에 배가 산산조각 나고 하나님께서는 선원들과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수백 마리 쯤 예비하셨을까?
요나의 진실함이 많은 선원들의 목숨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요나의 이 모습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셨을까? 비록 반대 방향으로 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사역자로 인정하신 게 아닐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값 얼마를 감추게 된 단초(端初)가 것은 사탄이었다.
(행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고, 순종하고자 하고, 충성하고자 하고, 흐트러지지 않으려 하지만 사탄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영적으로 방심했다고 보여진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늘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