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25
[25] 그림자 인생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친척관계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출생했다(눅1:26).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성탄절보다 육 개월 먼저인 6월 24일을 세례요한의 탄생일 곧, 축일로 기념하여 지키고 있다. 세례요한은 그림자 인생을 살았다. 그림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빛이 있어야 나타난다. 세례요한은 빛 되신 예수님의 존재를 세상에 선포하고 자신은 그 빛 뒤로 숨어 그림자로 살았다.
(요1:6-8)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세례요한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이렇게 규정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다시말해 예수님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하겠고, 자신의 이름은 반드시 잊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이런 신념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자신을 결코 앞세우지 않았다. 자신은 점점 쇠퇴해 가길 희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은 철저하게 스러져 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예루살렘 남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유대광야에서 성장했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마3:4). 메뚜기와 석청은 얼핏 건강식 같아 보이지만 가난한 광야의 구도자가 연명하기 위해 먹는 음식일 뿐이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했고 천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30세 쯤 되어 순교했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세례요한의 사역 기간은 대략 6개월 쯤이었던 것 같다. 혹은 그 이상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체포되어 투옥 중 순교를 당했다.
세례요한의 순교의 장면을 보면 조금 분통이 터진다. 분봉왕 헤롯의 생일 날 헤롯의 조카딸이었던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다. 헤롯은 기분이 좋았던지 살로메에게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의견을 물었고, 결국 세례요한의 목을 원했다. 여자 아이가 사람의 목을 요구했다는 자체가 비극이 아닐까?
헤롯왕은 세례요한의 목을 베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한 것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게 한다.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원했던 것은 헤롯과 자기의 불륜을 세례요한이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헤로디아의 남편이었던 빌립은 헤롯왕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시숙과 제수씨가 혼인한 것이다. 어느 노래 제목처럼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리고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 날 딸을 통해 세례요한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좋은 세월을 살지 못하고 일찍 순교했다. 흙 먼지 날리는 광야에서 들짐승처럼 지냈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고, 잠자리도 침대가 아닌 딱딱한 땅바닥이었고, 그의 마지막 또한 한 여자 아이의 요구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행복했을거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의 삶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특별하고 유일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 가운데서 오직 요한에게만 허락된 아주 특별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선포하는 일이 세례요한에게는 기쁨이었다는 것이다. 신부를 취하는 사람은 비록 신랑이지만, 신랑의 행복한 모습을 마주하는 친구들의 기쁨이 지금 세례요한에게 넘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신령한 기쁨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만큼 우리도 세례요한처럼 주님을 기뻐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목이 베어지는 순간에도 후회없이 살았다며 감사했을 것만 같다.
가장 진실한 사람은 죽음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죽음이 두려워 진실에 대해 침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세례요한의 거침없던 언변은 죽음 건너편에 있는 세상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으리라.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헤롯왕과 헤로디아 그리고 살로메는 세례요한을 핍박하고 그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들은 얼핏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자평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의 인생은 평탄했을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평가하고 있을까?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왕은 그의 본처의 본국이었던 페트라(Petre)의 아레타스 왕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도주하였고, 또 로마 황제의 진노를 사서 로마 원로원에 의해 프랑스 리용으로 추방되어 거기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또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겨울에 얼음 위를 걷다가 얼음이 아래로 꺼져 그만 날카로운 얼음에 목이 찔려 죽었다고 한다. 뿌린 대로 거둔 것이다.
세례요한은 지금 주님 품에서 안식하고 있을 것이나 이 악인들은 지옥불 가운데서 고통 당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오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만약 세례요한이 일찍 순교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세례요한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을까? 대부분 후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세례요한의 역할을 말라기 4장에 근거해 생각해 보면 예수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말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오늘날도 세례요한의 사역이 요청되는 시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관계회복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먼저는 가정이 상처에서 벗어나 회복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백성,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위해 세례요한처럼 그림자 되기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하겠다. 주님의 그림자 역할을 자청했으면 한다. 주님의 영광이 곧, 우리의 영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