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에세이 - 이삭
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
[4] 이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시대를 족장시대(Patriarchal Age, B.C.2166~1805))라고 부른다. 족장은 '아버지'라는 뜻이다.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이 족장들에 의해 공동체 규범이나 질서가 유지되었다. .
족장들 가운데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를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이삭은 가장 오래 살았고 유일하게 큰 사건 사고없이 순탄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이삭의 37세 때에 어머니 사라가 세상을 떠났다. 사라의 나이 127세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성경이 전하는 이삭의 일상은 빈 들에서의 묵상이었다. 물론 묵상이 하루 일과의 작은 부분일 수 있지만 성경은 이외의 이삭의 일상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
(창24: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이삭은 어머니를 잃고 3년 가량을 슬픔 가운데서 보냈다. 그러다가 나이 사십이 되자 아브라함이 이삭의 결혼 문제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자기 친족 가운데서 이삭의 배우자를 찾아주고자 했다. 그래서 늙은 종 엘리에셀을 자기의 고향으로 보낸다.
(창24: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늙은 종 엘리에셀은 낙타 열 필에 좋은 예물들을 가득 싣고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의 나홀성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게 된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었다. 다시말해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의 손녀였던 것이고, 리브가는 이삭에게는 조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엘리에셀은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오빠인 라반에게 아브라함의 안부와 사정을 전하고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다행히 모든 가족들의 동의를 얻고 그들에게 은금과 패물을 주고 리브가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창24:50-53)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집에 가까이 오던 시각에 이삭은 들에서 묵상하고 있었고 리브가를 보고 장막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다고 말씀한다.
(창24:66-67)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할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러나 리브가는 안타깝게도 불임이었다. 이 때문에 이삭은 리브가의 임신을 위하여 20년을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60세에 응답을 받았다.
(창25: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했다. 그런데 태중에 있는 아이들이 모태에서부터 서로 다투고 경쟁했다. 이삭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두 민족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더 월등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삭의 입장에서는 자식들의 분쟁에 관한 응답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쌍둥이니까 갑절의 기쁨이 있어야 할텐데 오히려 걱정을 떠안게 되고 말았다.
과연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너무 다른 성향을 보였다. 형 에서는 에너지 넘치는 활동가였고, 동생 야곱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창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매'
에서는 그 넘치는 에너지로 사냥꾼이 되었고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더 아꼈다. 반면 리브가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의 야곱을 더 아꼈다. 이삭과 리브가는 각자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창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가나안 땅에 다시 큰 흉년이 들었다. 아브라함을 곤란에 빠뜨렸었던 큰 흉년이 이삭의 시대에 또 찾아온 것이다. 이삭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그리고 블레셋 그랄땅에서 오랜 세월 정착 생활했다. 그랄에서의 정착생활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창26:1-2)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셨다. 과거 아브라함은 흉년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었다. 하지만 지금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블레셋 그랄 땅에 머물렀다. 그랄땅도 흉년이 들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삭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리브가의 아름다움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리브가에게 자신을 남편이 아닌 오라버니로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 거짓이 탄로나서 이삭은 큰 부끄러움을 당했다.
(창26: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이삭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기억은 아마도 블레셋 땅에서 씨를 뿌려 백배를 얻었을 때일 것이다. 흉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수확을 거둔 것이다. 이삭은 흉년에 거부가 되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모두가 파산을 선언할 때 역으로 거부가 된 것이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흉년이 지나고 이삭은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에서 이삭에게 축복의 언약을 주셨다.
(창26:23-24)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세월이 흘러 이삭은 나이가 들고 시력이 희미해졌을 때 작은 아들 야곱에게 속아 장자권의 축복을 해주고 말았다. 큰 실수였다. 이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라기 보다는 영적으로 둔감해진 이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창27:22-23)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이삭이 큰 아들 에서가 아닌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장자축복을 해줌으로써 형제간에 살륙이 일어날 상황이 발생했다. 이삭이 영적으로 좀 더 예민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국 리브가는 에서로부터 작은 아들 야곱을 지키기 위해 야곱을 밧단아람 외삼촌 라반에게로 야반도주 시킨다.
(창27:42-44)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이 날 이후로 리브가는 사는 날 동안 야곱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야곱은 몇 달이 아니라 이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리브가는 야곱을 그리워 하다가 죽었다. 흔히들 빗나간 자식 사랑의 결과라고 한다.
이삭과 리브가, 이들의 삶에 인생의 큰 회오리는 없었다. 그저 더 감사하며 살면 되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자식을 편애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 하는 안타까운 가족사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