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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에세이 - 요셉 (1)

문학n천국 2022. 8. 10. 22:08

성경인물 에세이 - 요셉

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

[6] 요셉 - 1

요셉은 야곱의 열 한번 째 아들이다. 그리고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아들이고 자식들 중에서 유독 사랑했던 아들이었다. 요셉의 이야기는 17세 시절부터 시작한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일러 바치는 것부터이다.

(창37: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야곱은 요셉이 형들을 고발하는 모습을 책망하지 않는다. 요셉을 그만큼 아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서 입힐 만큼 요셉에 대한 편애(favoritism)를 나타냈다. 다른 아들들의 심정은 헤아리지 않았다. 야곱은 이것이 요셉에게 화근(禍根)이 될 줄 상상하지도 못했다.

채색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색동 저고리가 아니다. 채색옷을 히브리어 성경은 소매가 있는 긴 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그콘서트 옥동자를 떠올리게 되는 색동 저고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막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의 풍습에 보면 각 부족에서는 오직 두 사람만이 매우 긴 소매 자락이 달린 옷 곧, 채색옷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그 부족의 족장이요, 다른 한 사람은 족장의 후계자였다. 왜 요셉의 형들이 그토록 요셉에 대하여 질투하고 분노했는지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창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야곱은 집안의 가업(家業)인 양 치는 일에 열 명의 아들들을 투입했다. 하지만 요셉은 노동에서 예외시켰다.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아들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꿈을 꾸곤 했는데 자신은 높아지고 형들은 머리를 조아리는 내용의 꿈들이었다. 또 이것을 여과없이 선포함으로써 요셉은 형들 앞에서 공공의 적(Public Enemy)이 되고 말았다.

야곱이 헤브론에 있을때 그의 열 아들은 북쪽 1백㎞ 지점인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야곱은 먼 곳에 있는 다른 아들들의 근황을 살펴보기 위해 요셉을 보냈다. 하지만 요셉이 세겜에 이르렀을 때 형들은 세겜 북쪽 30㎞ 지점인 도단으로 이동한 뒤였고 요셉은 고생끝에 형들 있는 곳에 도착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는 주변에서 가장 넓고 좋은 목초지가 있었다고 한다.

요셉의 형들은 멀리서 요셉을 보고 죽이기로 모의한다. 그러나 장자인 르우벤이 생명을 해하지는 말자고 만류하여 요셉을 광야의 한 구덩이에 던졌다. 또한 넷째 유다의 제안에 따라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은 20세겔에 팔아 버리고 말았다. 당시 성인 노예는 은 30세겔에 판매되었는데 요셉은 17세의 소년이므로 20 세겔에 넘기고 말았다. 

(창37:18-19)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37: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창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요셉은 본의 아니게(unwillingly) 죽음의 위기를 한 번 넘겼다. 하지만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그에게는 암담한 미래만 있을 뿐이다. 노예는 생명체가 아니라 물건 취급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요셉이 팔려간 곳은 애굽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다.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의 아들이 아니다. 보디발의 노예일 뿐이다.
(창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성경의 기록에만 의존해서 볼 때 요셉은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형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적응력(adaptability) 하나는 최고였던 것 같다. 요셉은 그저 상황에 순응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 같다.

요셉이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지 않고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히브리어에서 형통은 ‘찰라흐’라는 단어로 ‘앞으로 나아가다’ ‘발전하다’ ‘성공적인 결과에 이르다’ 는 의미이다.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장애물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하나님 앞에서 전진하는 삶, 발전하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가는 삶이 형통인 것이다.

보디발은 요셉이 형통한 사람인 것을 보고 그에게 집안 일 모두를 총괄하게 한다. 가정총무를 삼은 것이다. 그리고 요셉에게 맡긴 후 어떤 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요셉이 노예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낙하산 인사이자 파격적인 인사였다.

(창39: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 요셉에게 소리없이 위기가 찾아 왔다. 보디발의 아내 곧, 여주인이 어느 날부터 요셉에게 눈을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분홍빛 싸인을 보내는 것이다.

(창39: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기회라고 여길 것이다. 여주인을 즐겁게 해주면 삶이 형통할거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유혹에 단호했다. 요즘 말로 단호박이었다(단호박: 단호한 사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자존심에 대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다.

여주인은 매일 유혹해도 여전히 단호박인 요셉을 남편에게 거짓 고발한다. 요셉이 자신을 성폭행 하려 했다는 죄목이었다. 요셉으로서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요셉이 억울함을 토로했다는 말씀은 없다. 보디발이 감옥에 집어 넣을 때도 요셉은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워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보디발은 아내 앞에서는 요셉에게 화를 냈지만 본심은 요셉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노예에게 그런 의혹이 있으면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노예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격리시킨 것 외에 요셉을 채찍질하지 않았다.

아내의 체면도 세워주고 요셉에 대한 신임도 확인시켜 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그것이 보디발이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을까? 아내를 탓할 수도 없고 요셉을 벌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간 요셉에게 간수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시중을 들게 했다. 이들은 왕의 측근이자 고위급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모든 죄수들에 관한 사무까지 맡아 보게 했다. 이 말은 보디발처럼 간수장도 요셉을 신임했다는 것이다.

(창39:21-2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이렇듯 요셉은 가는 곳마다 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요셉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요셉과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우리가 그런 사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복음을 위해서 우리도 요셉을 닮아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