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에세이 - 요나 (2)
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43] 요나 (2)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들마다 특징이 있는데 앗수르와 몽골 같은 경우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국을 비참하게 짓밟고 특히 남자들은 살려두지 않았다고 한다. 앗수르는 포로를 묶어놓고 산 채로 피부 가죽을 벗기기도 했고 몽골은 사람들을 죽여 해골 언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민족들의 특징은 역사에서 단명했다(short-lived)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와 로마 제국은 정복한 나라들에 관용 정책을 펼쳤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은 본토를 떠날 때 3만 명의 군대였는데 전쟁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군대의 수가 늘었다고 한다. 항복하는 나라들을 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를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자기의 조국 북이스라엘을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虎視眈眈) 기회를 엿보는 잔인한 야만족(barbarian)인 앗수르를 하나님께서 품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요나는 그래도 명색이(nominal) 선지자인데 본래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아닌 하필 앗수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오기(傲氣)가 발동한 것이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결국 붙잡혀 왔다.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요나는 조금 유연해졌다. 이제는 고분고분 앗수르의 도성인 니느웨로 길을 떠났다.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했지만 열심을 내지 않았다. 니느웨 성은 사흘 길인데 하루 동안만 다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마도 요나는 마음속으로 하루 길도 이 백성들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욘3: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무관심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하루 동안만 말씀을 전했음에도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explosive)이었다.
(욘3:5-6)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니느웨 백성들이 왕으로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식하며 회개했다. 사람만 금식만 한 게 아니다. 짐승까지도 금식시키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스스로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났다.
(욘3:7-8)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보시고 뜻을 돌이켜 예정하셨던 재앙을 취소하셨다. 대반전(big twist)이었다.
(욘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이 악한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나는 아직 앗수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욘4:1-3)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하나님께 성질을 부렸다.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줄 알았기 때문이라며 항변한다. 그리고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해선 안되는 말을 하고 만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는 말이다. 과거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했던 기도와 같다.
(왕상19:3-4)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요나와 엘리야 이 두 선지자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은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그럴바엔 차라리 나를 죽이시라고 압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과 기도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나 오만한(arrogant) 태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병상에서 죽어가면서 한번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정말 세상물정(世上物情) 전혀 모르는 아이들의 기도인 것이다. 선지자라고 해서 모든 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욘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요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돌아보도록 하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한 일과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던 일 등 과거의 그의 행적을 돌아보게 하셨다. 요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욘4:5-7)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요나는 니느웨성의 종말을 꼭 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니느웨 성이 한 눈에 내려다 뵈는 동쪽 언덕에 초막을 지었다. 과거 소돔성이 심판 받을 때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내려 소돔성 전체를 잿더미가 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 요나의 마음속의 바램이 그렇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하사 박넝쿨이 요나의 머리를 가리우게 했다. 따가운 햇살로인해 그늘을 만들어 요나에게 쉼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요나는 시원한 그늘 아래서 마음이 즐거웠다. 니느웨만 멸망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as happy as can be)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하나님이 벌레를 박넝쿨에 보내시니 벌레가 갉아 먹자 박넝쿨이 곧 시들어 버렸다. 어제의 행복이 끝나버린 것이다. 가만히 있을 요나가 아니었다. 또 불평하며 죽여 달라고 항변한다. 이틀 연속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 그래도 요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욘4:8-9)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그렇다고 요나를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요나는 괜챦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중심의 세계관은 신앙인에게 백해무익할(good for nothing) 뿐이다. 자기 뜻대로, 자기 가족의 이익이나 자기 민족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만 옳다고 하는 것은 비신앙적일 수 있다.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니느웨 백성들의 영혼이다. 당시 니느웨성의 인구는 대략 60 만명으로 추산한다. 이 가운데 어린 아이들이 12 만 여명이었다. 니느웨성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옳은 것 만큼 저 많은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도 하나님께는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나는 심판만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뼈 골짜기로 인도하셨다. 수만의 뼈들이 앙상한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에스겔은 낙담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살아있는 이름으로 불러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하여 뼈 골짜기에서 군대가 일어섰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오늘 우리의 중요한 과업이자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겔37:4,7,10)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