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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에세이 - 사마리아 여인

문학n천국 2022. 12. 21. 18:08

성경인물 에세이 - 사마리아 여인

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47] 사마리아 여인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다(B.C.931). 그리고 200 여년이 흐른 뒤 호세아 왕 9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BC722). 남유다는 130 여년이 더 흘러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B.C.586).

앗수르 제국은 여러 민족을 정복하면서 혼혈(混血,multiracial) 정책을 썼다. 피를 섞어 순수 혈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방인과 피가 섞이면 민족해방 운동이나 반란의 동력(動力,power)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을 끌고 가 앗수르 땅에 옮기고 반대로 다른 이방 민족들을 북이스라엘 땅 곧 사마리아 땅에 강제 이주시켰다(migrate).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방 민족들의 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가 섞이게 되었다.

(왕하17:6) '호세아 제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던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이 아닌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훗날 유대인들은 유대 땅과 갈릴리 땅을 왕래할 때 유대 땅과 갈릴리 사이에 있던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방향으로 우회해서 지나갔다. 그만큼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면 3일, 요단으로 우회해서(bypass) 가면 6일쯤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혼혈을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면서 유대인들의 적대감정은 커져갔고 결국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출입을 봉쇄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들은 할 수 없이 사마리아 땅 그리심산(Gerizim)에 그들만의 예배처소를 만들게 되었다. B.C. 322년에 건축된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은 200 여년 뒤 B.C.128년에 파괴되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가실 때 보통의 유대인들이 선호하는 우회경로가 아닌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 가고자 하셨다. 이것은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성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제 육시였다.
(요4:6)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제 육시에 대해 조금 혼란이 있다. 현재 우리 시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복음서 가운데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유대식 시간을 따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로마식 시간 계산법을 따라 기록하고 있다.

다시말해 유대식으로 제 육시는 정오이고, 로마식으로는 오후 6시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는 뜨거운 한낮을 피해 저녁에 물 기르는 것이 관습(창24:10-1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후 6시가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이 도보로 여행하시던 중 피곤을 느끼셨다면 정오쯤이 아닌 오후 늦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창24:10-11)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요4:7-8)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때마침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예수님이 쉬고 계시는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다. 과거에는 한낮 매우 더운 시간에 더위를 피해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이 여인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에 왔다고 가르쳤었다. 유대식 시간법으로 육시를 계산하면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 여인은 창녀였을거라고 가르쳐 왔다.

진실은 주님만 아신다. 다만 요한복음이 로마식 시간법을 따른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사건을 해석하고자 한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스스로 창녀임을 드러낸 적이 없다. 입술을 새빨갛게 하고, 진한 눈썹을 그리고(drawing), 교태를 부리지 않았다. 이 여인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 한 모금 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되물었다. 당시 문화는 남자가 모르는 여자에게 먼저 접근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유대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여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아오신 목적을 밝히셨다. 하나님의 선물을 그 여인에게 친히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은 곧 생수였다. 여기서 생수는 지하수(Groundwater)를 뜻하는게 아니라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한다.

(요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은 조상 야곱을 소환한다(summon). 이 우물은 야곱이 물려 준 것이고 야곱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생수를 퍼가지고 간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이 우물의 주인은 조상 야곱인데 당신은 야곱과 어떤 관계인지 묻는 것이다.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는 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신다. 여인은 의아해 하며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이 가슴에 꼭꼭 숨겨온 진실을 말씀하신다.

(요4:16-19)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한마디로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이다.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것은 그 남편들이 줄줄이 사탕으로(continuously) 다 일찍 죽었다는 의미이거나 이혼 당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있는 자는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걸로 봐서 동거남 쯤 되는 것 같다.

여인은 뜬금없이 예수님에게 선지자라는 호칭을 붙여 부른다. 여인이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사정을 다 꿰고 있는 사람이니 그렇게 부른 것이다. 여인은 이제 주님의 말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인은 이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고뇌를 예수님께 고한다. 예배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공간)는 본질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요4:20-22)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럼 예배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가 쉽게 암송하는 구절인데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참 예배이다. 쉽게 말해 예배는 강연이 아니다. 설교만도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소통의 도구는 말씀이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는 터치(touch)가 있다. 주님의 만지심이다.

(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가르치신 후 자신이 예배의 알파와 오메가(ΑΩ) 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다.

(요4:25-26)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제 여인은 지체없이 자기의 할 일을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온 동네에 전하는 일이다. 사마리아의 이름없는 한 여인이 행한 이 증인의 삶이 곧 오늘 우리의 목적이고 비젼이어야 한다.

(요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삶이 버거운 것은 우리와 주님이 기찻길 철로처럼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님과 접촉해야 한다. 그러면 살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가장 넓게 오픈하시는 시간은 예배이다. 예배는 모든 인생들의 지름길(shortcu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