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에세이 - 바울 (1)
김상용목사의 성경인물 에세이 {평범하거나, 위대하거나}
[52] 바울 (1)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다. 이 청년은 가말리엘(Gamaliel)의 제자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말리엘은 최고의 지성이었다. 그래서 가말리엘의 문하생(pupil)이었다는 것은 곧 좋은 이력(record)이다. 요즘 표현으로 사울은 유대 사회의 엘리트 청년이었다.
사울은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유대교에 헌신한 청년 사울 앞에 예수를 비롯한 제자들이 나타나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예수 제자공동체가 성장을 거듭할수록 사울의 분노는 쌓여간다.
사울은 예수 제자공동체를 모세를 배반한 이단 집단으로 규정한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때 사울도 그들의 모의에 적극 동참한다. 그리고 기독교 말살을 위한 유대교 대책위원회의 청년 행동대장(Caporegime)이 된다.
이들의 첫 번째 희생양이 스데반(stephen) 집사였다. 스데반 집사는 성 밖으로 끌려가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건이지만 가해자들은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기존의 기득권층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비호(protect)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인 후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 잡아들이기 위해 유대 땅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첫 타깃(target)으로 다메섹(Damascus)에 있는 제자들을 잡아 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들고 길을 떠난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80 km 정도의 거리이고 도보로 70시간 정도 소요되는 길이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은 스데반 순교 이후에도 여전히 살기등등(殺氣騰騰)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그 길이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길임을 알지 못했다. 그토록 미워하는 예수 앞에 거꾸러 질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는 무섭도록 찬란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행9:3-5)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하늘에서 강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다. 사울은 엎드렸다. 그리고 사울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있었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또한 사울은 결정적으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사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앞장서서 처단하고자 했던 예수가 메시야(Messiah)임을 다메섹 도상 위에서 깨닫고 영적으로 좌절하고 만다. 요즘 말로 멘붕(mental breakdown)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면 네 인생의 방향을 지시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울은 더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행9: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이 이렇게 고분고분한(submissively) 것은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밝은 빛을 봄으로 일시적인 시력상실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때 강한 빛 때문에 안질(眼疾)을 앓게 되었다고 말한다.
조선의 임금 가운데 세종대왕이 안질을 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종대왕은 재위 24년에 안질로 인해 세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자 결심한 것을 보면 통증과 시력 저하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9:8-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 곧 훗날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눈이라도 빼어 줄 만큼 나를 섬겼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이것이 안질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사울은 이제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다는 엄청난 죄책감으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사울은 다메섹에 도착해서 삼일을 금식한다. 이것은 그의 내적인 충격을 짐작케 한다.
(행9:8-9)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동안 영안(spiritual eyes)이 열려서 자기 시력의 치유를 미리 보게 된다. 아나니아(Ananias)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함으로 다시 보게 되는 일이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이다.
(행9:10-12)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하지만 아나니아는 사울을 두려워한다. 이미 사울에 대한 소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아마 스데반의 순교 소식 또한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미 사울은 제자들에게 기피(avoid) 대상이었다.
(행9: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 곧 바울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겪을 큰 고난을 말씀하신다. 어쩌면 바울이 감당해야 할 엄청난 고난때문에 그동안 청년 사울의 행위를 참아 주신게 아닌가 싶다.
(행9:15-16)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한다. 아나니아가 기도하자 사울은 다시 보게 된다. 이제 사울이 바라보게 된 세상은 사흘 이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사울은 곧바로 세례(baptism)를 받는다. 인생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행9:17-18)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 약 10 여년이 흐른 뒤 바울로 불려진다. 흔히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고,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울과 사울이라는 두 개의 이름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래 팔레스틴 유대 본토 출신이 아니고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의 관할 하에 있었던 다소(지금의 터기 남부)에서 다소(Tarsus)와 로마 시민권자로 출생한 디아스포라 유대인, 곧 이민자 출신 유대인이었다(행 21:39; 22:3,27-29).
그래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 이름인 사울과 로마 이름인 바울의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 사건 이후에도 오랫동안(적어도 10년 이상) 여전히 사울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행11:25-26,11:60,12:25).
아마도 바울은 로마의 행정지역인 이방세계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유대인 이름인 사울보다 로마 이름인 바울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금식 후 기력을 회복한 사울 곧 바울은 자기가 핍박했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의 태도 변화에 놀란다. 불과 며칠만에 핍박자에서 복음전도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힘을 다해 예수를 증거했다. 핍박자의 열심보다 더 강한 열정으로 예수님을 증거했다.
(행9:19-22)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만약 바울이 유대교인으로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편에서 계속 교회를 핍박했다면 그의 종말은 끔찍했을 것이다. 물론 육신은 편하고 권세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소아시아와 유럽 지역 복음화를 위해 가난과 질병과 박해를 벗삼아 온 생애를 드렸기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세상 유행가 가운데 가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의 반복되는 후렴구에 이런 가사가 있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람으로서 이 노래를 이렇게 개사해 불렀으면 한다.
'힘을내자~ 힘을내자 ~방황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