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75]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23:37-39)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언대로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말았다.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눅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루살렘성은 7 개월간 포위되었고, 함락된 후 예루살렘 성전은 불태워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110만명이 죽고 9만7천명이 포로가 되었다. 성이 포위된 동안에 예루살렘 성은 굶주렸고 강도가 득실거리고 인육을 먹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은 다윗왕이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서 이후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이때가 B.C.1,000 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A.D.70년에 멸망했으니 약 1,100여년 가까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가지 않았다면 누구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 년 이상 이스라엘을 품어 주셨다. 범죄하는 백성들을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걷어 차버리고 말았다.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품으면 독수리의 공격에도 새끼들은 안전하다. 어미는 알을 부화하기 위해 대략 3~4주 동안 품 속에 알을 품는다. 이때 어미 암탉의 체온은 40도를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어미 암탉은 천적의 공격에 몸이 찢겨져도 새끼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는 백성들을 그렇게 품어 주셨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길로 뛰쳐 나갔다. 주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그래서 이 짧은 본문 안에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인내가 온전히 녹아져 있다.
눅8:26-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들어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셨다. 이 사람은 무덤에서 사는 사람으로 옷도 입지 않고 생활했으며 험악했다. 어느 누구도 그 앞으로 통행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물으셨다. 귀신은 엎드려 자기 정체가 군대라고 실토하며 무저갱, 곧 지옥으로 보내지 마시길 간구했다. 대신 멀리 보이는 돼지떼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시길 구했다.
결국 그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이 나와서 돼지떼 이천 마리에게로 들어갔다. 돼지들은 몸 속을 파고드는 귀신의 영들 때문에 몸이 뜨거워지자 모두가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익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왔고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온전해진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주시길 간구한 것이다. 보통의 상식이라면 예수님을 오래 머무시게 하고 은혜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더 절실했던 것은 은혜가 아니었다. 구원이 아니었다. 경제적인 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예수님이 능력을 나타낼수록 자신들이 맞이하게 될 손해를 계산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자기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삶에서 밀어내고 만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밀어냈던 것이다. 암탉이 새끼를 품듯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백성들을 품으려 하셨지만 백성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말았다. 수많은 선지자를 핍박했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현실이었다.
예수님을 그들의 삶에서 밀어낸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나아가게 했고 결국 목자 잃은 양떼가 되고 말았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우리는 이들처럼 어리석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삶에 초청할 뿐 밀어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