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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산책 81.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마26:6-13)

문학n천국 2021. 12. 18. 18:36

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81]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26:6-13)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방 안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병행본문인 막14:3-9절, 요12:1-8절에 보면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이었고,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장소가 문둥이 시몬의 집이 아닌 나사로의 집이었고 향유를 부은 사람은 마리아였다고 조금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은 머리가 아닌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2:3).

나드는 인디언 식물로써 잎과 줄기와 뿌리에서 향유를 추출한다. 이 향유는 옥합이라는 석회로 만든 예쁜 병에 담고 밀랍으로 밀봉했다. 향이 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 향유는 노동자의 일 년치 임금인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었다.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만족하셨다. 자신의 장례를 위함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제자들 앞에서 여인을 변호하셨다.
(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막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 비싼 것을 왜 허비 하느냐며 여인을 질책했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며 비난했다. 여인의 헌신을 알아 본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었다.
(26:8-9)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리아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마리아는 향유를 주님께 부어 드림으로 자기의 행위가 논란이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오로지 주님께 감사하여 드렸을 것이다.

마리아를 비난한 사람들은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유다라고 콕 찍어 지목하고 있다. 이 가룟유다는 제자들의 재정을 관리하는 총무였는데 공금을 조금씩 횡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돈 욕심때문에 마리아를 비난했던 것이다.

(요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제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알리고 그녀를 기억할 것을 명령하셨다.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네 개의 복음서를 통틀어 마리아만큼 의미있는 헌신을 했던 사람은 없어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예수님의 장례를 예견하고 의미있는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을 반대만 했을 뿐 아무도 장례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리아의 향유 드림이 더 빛이 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리아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그녀와 같은 헌신이 이후에도 교회역사에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심이 아닐까? 돈만 보았던 제자들과 달리 복음을 보았던 마리아의 신앙을 교회가 본받기를 기대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수님의 탄생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죽음도 복음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눈에 보인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그들 사역의 우선순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에 보인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복음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십자가를 지시고 하늘로 돌아가실 주님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차이점을 우리는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한 자, 상처 받은 자를 돌보는 것은 기독교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는 늘 주변을 돌아보고 이들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할 것은 순수복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잘 분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