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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산책 85. 가룟유다의 극단적인 선택 (마27:3-10)

문학n천국 2021. 12. 22. 18:08

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85] 가룟유다의 극단적인 선택 (27:3-10)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데에는 가룟유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을 뿐 적당한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던 때에 가룟유다가 나서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댓가는 은 삼십 냥이었다. 이것은 은 삼십개의 갯수가 아닌 중량으로 당시 소 한 마리 값이나 노예의 몸 값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 사건은 구약성경에도 예언되어 있다.

(슥11:12-13)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단순히 은 삼십냥을 생각했을 때 가룟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은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층에게 매우 골치아픈 존재였다. 현상금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유명한 인사를 제거하는데에 은 삼십냥은 너무 턱없는 가격이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그들을 찾아가서 돈 문제로 설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냥 그들이 주는대로 은 삼십냥을 받고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찾았다. 돈 때문이었다면 액수 때문에 다투었을 것이다. 가룟유다는 겨우 노예 한 사람의 목숨 값만 받고 스승인 예수님을 넘긴 것이다.

(마26:14-16)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자주 방문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알기 어려운 외진 장소에서 예수님을 조용하고 은밀하게 체포하고자 함이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마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함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이때 가룟유다는 은밀히 빠져나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군사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향했다. 운명의 밤이 찾아 온 것이다.

가룟유다의 치밀한 계획은 성공했다. 위협을 느낀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고 홀로 남으신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군사들에게 예수님을 넘긴 유다는 씁쓸한 입 맛을 다시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에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살피던 가룟유다는 후회하게 된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판결이 예상되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찾아가 자기가 무고한 분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며 받았던 은 삼십냥을 그들 앞에 던지며 사라졌다.

(27:3-4)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가룟유다는 스스로 뉘우쳤다고 말씀한다. 영어성경에는 'repented himself' 로 표현하고 있다. 후회했다, 회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룟유다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갔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구약시대에 암몬의 신 몰록을 섬기던 사람들이 자녀들을 불태워 몰록 신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던 죽음의 골짜기이다(렘7:31). 그곳 중심부에 아람어로 아겔다마(피밭)라 불리는 곳에서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아마 낭떠러지 위 나뭇가지에 목을 맨 것 같다. 사도행전 1:18절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룟유다가 목을 매 숨을 거둔 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계곡 아래로 떨어져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 가룟유다는 배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스승을 팔아 죽음에 넘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배반한 종이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을까? 가룟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예수님에게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끝까지 랍비 곧 선생님으로 호칭했다. 다시말해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구원자(메시야)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영웅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룟유다와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얻기 위해 주님을 신앙해야 한다. 그것이 참 목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라나타, 곧 다시오실 주님을 늘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계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