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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요나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문학n천국 2022. 2. 23. 17:31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8

[8] 요나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제국이자 근동지역을 처음으로 통일시킨 제국이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왕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이다. 니느웨는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Mosul)지역이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파송된 시기는 B.C.760년 경이다. 당시 앗수르의 국력은 주변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특히 이 무렵에 앗수르 제국 안에 전염병이 창궐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낮에도 캄캄한 일식 현상이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파송된 것이다. 요나는 사흘 길이나 되는 니느웨성을 단 하루만 다니며 멸망을 선포하고 중단했다. 그런데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했을 뿐인데 온 백성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전염병이나 일식 현상 등으로 인해 민심이 예민하던 차에 요나가 심판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이다. 요나의 메시지는 성의가 없었다. 간절함도 없었다. 하지만 효과는 폭발적이었다. 이미 니느웨는 복음을 받아 들일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요나는 심판 메시지를 겨우 하루 동안 선포한 뒤 성읍 동쪽에 나가서 니느웨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다. 니느웨가 소돔처럼 처참하게 멸망하길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욘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바랬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다. 니느웨 사람들이 비록 회개하는 시늉은 했지만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요나는 걱정 반, 설렘 반이었다. 아마 요나에게는 뿌리 깊은 반 앗수르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민족에게 반일 감정이 있는 것과 같다.

니느웨의 멸망을 설렘으로 기다리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초막에 그늘이 지게 해서 따가운 햇살로부터 지켜주셨다. 요나는 박넝쿨 때문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먹어 시들게 하셨다.

(욘4:6-7)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그러자 요나가 하나님께 짜증 섞인 어투로 말한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는 요지였다. 따가운 햇빛에 조금 노출되었다고 죽여 달라는 모습에서 요나가 과연 선지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을 갖게 된다. 요나는 하나님께 죽여 달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욘4:3,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요나만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이건 뭐 고집불통이다.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하나님께 짜증내고, 죽여 달라며 성질 부리는 선지자이다. 부모 앞에서 자식이 이런 태도라면 꿀밤 한 대 먹이면 되는데 선지자가 이러고 있으니 참 답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악한 민족, 악한 성읍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이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욘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니느웨에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십이만 여명이고, 가축도 많이 있었다. 당시에 십이만 명이면 대도시이다. 과거 소돔성을 심판하실 때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심판을 실행하셨는데 니느웨는 의인 열 사람은 커녕 한 사람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손을 내밀고 계신다.

이렇게 상반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구는 심판하시고, 누구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게 옳을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 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니느웨는 죄악의 성읍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 두 아들은 한 아버지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다.
(말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만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니느웨에는 십이만 여명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시고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무언가가 있었던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길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가장 악한 성읍이었던 니느웨가 구원받은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 요나 선지자가 아무리 반대를 하고 짜증을 내어도 하나님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요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은 남은 일생을 하나님의 그늘에 들어와 돌보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말씀에 대한 청종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동반하지 않은 기적이나 사건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니느웨 백성들은 평생 딱 한번 듣게 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죄를 자복했다. 반대로 오늘날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히려 말씀을 외면하기 일쑤이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해선 안된다. 요나가 하나님 앞에 취한 행동을 우리가 답습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불평하는 것은 요나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요나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요나를 본받기 위함이 아니다. 요나의 교만을 거울 삼아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능동적으로 아멘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그런고로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행위는 절대 삼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