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10
[10] 광야를 지나야 한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기를 요청했다. 보통의 아버지라면 나 죽은 다음에 너희들 끼리 잘 나누라며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면 호통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순순히 유산을 나누어 주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 보면 맏아들은 다른 형제의 갑절을 유산으로 받도록 명령하고 있다(신21:15-17). 이 집은 아들이 두 명이니 큰 아들에게는 2/3, 작은 아들에게는 1/3을 상속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조금 특별한 점은 아버지도 이 작은 아들을 나무라지 않고, 형도 동생을 질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은 아들이 무슨 비전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새로운 사업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작은 아들을 너무 믿었던 것일까? 작은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아버지 재산의 1/3을 상속받아 외국으로 나갔다. 이 상황까지 아버지와 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작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찾아간 사람은 창녀였다.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함이었으리라. 작은 아들은 그곳에서 창녀에게 아버지께 받은 유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 고급 양주에 예쁜 여자와 여흥(餘興)을 즐겼다면 밑 빠진 독처럼 재물을 탕진하기 까지 잠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작은 아들이 방탕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일어나는데 바로 흉년이었다. 재물을 탕진한 상황에서 흉년이 오자 아들은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의지할 곳은 없었다. 돈이 떨어지니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작은 아들은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야 환영 받을 줄 알기에 그 땅에서 좀 더 버텨 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갈 곳이 없다. 숙식이 가능한 일자리를 찾았지만 돼지 농장 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그곳에 취직해 돼지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을 했다. 돈이 없으니 돼지 사료를 먹어야 했다. 얼마나 비참한가?
이때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여유가 있어 품꾼을 부리며 살아간다. 품꾼들도 굶주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가 자기를 품꾼의 한 사람으로 받아주길 부탁해야겠다고 결단한다. 여러 날 굶주려 보니 창피한 것도 없었다. 무조건 아버지 집으로 출발했다.
아버지는 날이면 날마다 동네 어귀를 바라다 본다. 아들이 성공해서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해서가 아니다. 경험도 비전도 없이 나아갔으니 분명 좌절을 맛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돌아올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 아들은 흡사 거지꼴이 되어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을 안아 주었다. 아들의 변명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돌아와 준 것에 고마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사정을 알게 된 큰 아들은 동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반가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방탕을 비난한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서운함을 토로한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으니 즐거워 하는 것이 맞다며 큰 아들을 달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11-32절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의 내용이다. 이 비유에서 주목 받아야 하는 사람은 작은 아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큰 아들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믿어주고 응원해 주고 기다려 주는 아버지와 동생처럼 자기도 유산을 달라며 억지를 부리지 않았던 큰 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내치지 않으시고 싸매고 어루만져 주신다. 그렇다고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본받는 것은 위험하다. 작은 아들은 신중함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께 의견을 물어 보았어야 한다.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는 존재이다. 오늘 실패했어도 내일 또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백 번 실패했어도 용기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작은 아들이 다 잘못했어도 딱 하나 잘한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는 배워야 한다. 무작정 떠나면 실패한다는 것,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어야 한다는 것, 육체의 쾌락은 인생을 허비하게 한다는 사실, 나를 깊이 이해하는 분은 아버지 뿐이라는 사실,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아들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겠다.
작은 아들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허기를 채우게 되었을 때이다. 이건 아니지? 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부터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렇게 광야에서 외톨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지는 것 같다.
<광야를 지나며> 라는 CCM이 있는데 그 곡의 가사의 일부분이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며,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광야에 일찍 내몰린 사람들이 빨리 성숙해지는 것 같다. 외로움에 처절하게 몸부림 쳐 본 사람이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 같다. 광야는 어떤 시설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훌륭한 신앙인을 배출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종 모세도 홀로 광야 40년을 견디어 내고 나서 수백만 명을 거느린 지도자가 되었다. 광야학교를 훌륭하게 수료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나이는 80세, 노년이었다. 그럼에도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
작은 아들은 외국에 나가서 돈을 다 허비하고 돼지 배설물을 치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에게는 돼지 사료로 연명하며 살았던 그곳이 광야였을 것이다. 세상 어디도 기댈 곳 없는 삶 그곳이 광야이다.
아마 짐작하건대 집에 돌아온 작은 아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맨 밑바닥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외로운 광야의 삶을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감사하며, 더 목표에 집중하며, 더 열심히 살았을 거라 생각한다. 작은 아들의 방탕했던 삶은 두고 두고 스스로에게 채찍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오늘 우리가 외로운 광야를 걷고 있다면 좀 더 힘을 내야 한다. 광야의 그 경험이 결국 우리를 새로운 축복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