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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혁신(革新,innovation)하라'

문학n천국 2022. 4. 4. 22:10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26

[26] 혁신(革新,innovation)하라

죽음을 늘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보통은 부모님이나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보면서 그때서야 생각하게 되는 단어가 죽음이 아닐까? 흔히 말하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 뒷면이다. 삶은 과정이고 죽음은 결말이다. 인간이 무능한 것은 자기 삶의 결말을 자기가 주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운동 선수들의 유니폼 백넘버(back number)처럼 자기에게 남은 날을 큼지막한 숫자로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시간을 허투루 쓰진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날을 알 수 없기에 삶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것이다.

어느날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을 면담하기 위해 찾아왔다.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13번 째 왕이다. 그의 부친은 아하스 왕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왕이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다윗과 함께 성군(聖君)으로 불리는 왕이다.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이 되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히스기야를 찾아온 시기는 통치 14년 째이다. 다시말해 히스기야의 나이는 39세였던 것이다. 이사야가 입을 열었다.
(사38: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성경은 전후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렸다고 말씀한다. 히스기야의 병명을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유언하라고 말씀하셨다. 39세의 젊은 왕에게 유언이라니? 히스기야가 받았을 충격이 컸으리라. 여기서 유언은 히스기야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후사를 결정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왕실 가족 가운데 다음 왕을 지명하라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선지자로부터 죽음을 통보 받고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마 억울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평생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왔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지난 날 자신의 삶을 회고해 주시길 간구했다. 히스기야는 기도를 마치고 통곡했다.

(사38:2-3)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누가 죽음 앞에서 의연(毅然)할 수 있을까? 비록 한 민족의 왕일지라도 죽음은 감당하기 버거운 감정일 것이다. 히스기야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서 통곡했다.

성경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환영했던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 출생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기도하던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늘 소망하던 사람이다. 그는 죽을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눅2:28-29)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히스기야의 통곡을 보신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뜻을 다시 전하게 하셨다.
(사38:5-6)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겠다는 약속과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셨다. 당시 강대국 앗수르가 호시탐탐 유대 땅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위기 가운데 있었고, 히스기야 자신의 생명도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는데 모든 위기에서 구원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이 히스기야에게는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풍전등화 같던 유대 민족의 위기를 물리쳐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15년의 건강한 삶을 보장 받았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이 최상의 시나리오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히스기야처럼 밑바닥 경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하나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꼭 필요해서일까? 광야 체험은 꼭 필요한 것일까?

세상에서 성공한 기업가들 중에 더러 이 질문에 답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 일본 생활창고(주) 호리노우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바닥까지 갔을 때 비로소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더라' 라고 했다. 새로운 발상(發想)은 밑바닥에서 더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번쩍였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밑바닥 궁지로 밀어 넣으시는 것은 우리의 혁신(革新,innovation)을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 혁신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통해 변화를 유도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유대인이지만 애굽 왕자로 40년을 살았다. 젖먹이 시절 왕자로 입양되어 모든 선진 학문을 배웠고 권력의 보호 아래 살았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기억했고, 40세 때 유대인 노예를 보호하다가 애굽인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광야로 도망치게 되었다.

모세의 애굽 왕자로서의 40년 세월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갖게 하는데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유대인이 되려고 해도 애굽 왕실의 관습에 너무 오래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 유대인이자  반 애굽인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내광야에서의 40년 은둔 세월을 보내며 온전한 유대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에 독보적인 출애굽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된다. 더이상 애굽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여 십계명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율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광야는 인생에 대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광야는 우리의 인생을 개혁하는 공간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광야이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혁신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때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