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28
[28] 말씀으로 이끌림 받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정착했던 기간은 430년이다. 창46:27절에 의하면 야곱의 가족 70명으로 시작한 애굽에서의 이주 생활은 430년이 지난 출애굽 당시 남자 성인만 60만명이 되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족히 200만 명을 넘겼을 것이다.
출애굽은 민족 간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계약 기간 만료로 출애굽을 한 게 아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선포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애굽 바로왕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200만명이나 되는 노예를 풀어 주면 누가 힘든 일을 대신할 것인가? 이 때문에 바로왕은 출애굽을 저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열 가지 재앙을 겪으면서 애굽의 바로왕은 차라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것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 앞에 바로왕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열 가지 재앙은 애굽의 숨통을 끊어 놓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당당하게 걸어서 나왔다. 오히려 애굽 백성들이 온갖 패물과 의복을 건네주며 신속히 떠나가길 희망했다(출12:35-36). 그러나 몇 일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바뀐 바로왕이 군대를 동원해 이스라엘을 몰살시키고자 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은 구원하셨고 애굽 군대는 바다에 수장하셨다. 기적의 파노라마(Panorama)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출애굽 후 한 달이 지났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모두 떨어져 갔다. 지금까지의 여정은 기적 그 자체였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 백성들은 여전히 흥분 상태였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지자 백성들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불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백성들의 감사는 점점 퇴색하고 불평이 고개를 들었다.
(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맘껏 먹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노예들에게 그런 호사(豪奢, luxury)를 누리게 할 나라가 어디 있을까? 백성들은 큰 기적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보통 큰 기적을 몇 번 경험하면 믿음의 뚝심(perseverance)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은 너무나 현실적인 신앙의 한계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새로운 중장기적 계획을 선포하셨다. 일명 식량 공급 계획이었다.
(출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굶주림을 염려하는 백성들에게 일회적이 아닌 장기적으로 양식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 양식이 만나와 메추라기였다. 메추라기는 비록 한 달 동안만 공급되었지만 만나는 광야 생활 40년 내내 공급되었다.
광야를 지나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하늘 뿐이다. 행군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200만 명이 매일 먹을 양식을 농사 짓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간의 수학적 셈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 없이 단독으로 출애굽을 계획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아니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양식을 구할 것인가에서 막혔을 것이다. 그만큼 출애굽은 큰 프로젝트였다. 홍해를 어떻게 건너며,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목적지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하고, 야영은 어디서 하며, 가장 중요한 물과 음식은 어떻게 공급 받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애굽 자체가 워낙 스케일(Scale)이 큰 사건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큰 인물을 세우셨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모세였다. 광야 40년 동안 백성을 관리하고, 인도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미 40년을 시내광야의 거친 환경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처음에 출애굽 사명을 버거워 했다. 말이 유창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말로 하는게 아니었다.
(출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애굽 땅을 뒤덮은 열 가지 재앙이나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위임하신 능력이었다. 다시말해 문제를 극복하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 기적과 유사한 사건이 신약의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물론 출애굽과는 규모가 다르지만 주님께서 역사하신 방식은 많이 닮아 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현장, 곧 벳새다 들녘에 남자만 오천명이 운집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숫자는 갑절 이상이 될 것이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 각자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제자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구해 왔을 뿐이다. 급식 차량 수십 대가 와야 할 상황에 작은 도시락 하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도시락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드리고 난 후 그곳은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 도시락은 나눌수록 더 풍성해졌다.
그럼 하나님께서 만나의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목적이 무엇일까?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하기 위함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그 통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목적을 맞추고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 그것이 비결이라는 것이다.
(신8:3-4)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삶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훈련했던 것이 이것이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따라가고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장막을 쳤다. 각자의 컨디션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걸음을 주관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목적은 만나와 메추라기가 아니어야 한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기 전에 먼저 구름기둥, 곧 말씀에 이끌림 받는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