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29
[29] 부활을 꿈꾸라
나의 소싯적 기억에 죽은 사람의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노래를 '상여소리'라고 했는데 그 가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라고 앞에서 종을 치는 사람이 선창하면 상여꾼들이 '어어야~ 이이제~' 라고 불렀다. 일종의 장송곡(requiem)이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교회 밖에 있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증거였다. 성도들의 장례식에는 찬송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한 번 죽으면 되돌릴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곧 천국과 지옥이다.
구약성경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 경우는 두 번인데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과(왕상17:17-24),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것이다(왕하4:32-37).
신약성경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요11:1-4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고(마9:18-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기록하고 있다(눅7:11-17).이들은 예수님께서 살리신 사람들이다. 또한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다비다를 살렸고(행9:36-42), 청년 유두고를 살렸다(행20:9-12)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총 여덟 명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부활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 뿐이다. 부활을 성경적으로 정의하려면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변화된 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아닌 변화된 영광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사로처럼 본래의 육신의 몸 그대로 살아났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회생(回生, revive)일 뿐이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 복음도 십자가와 함께 끝이 날 줄 알았다. 복음이 예수와 함께 무덤에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대는 크게 어긋났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를 지시던 모습이 아닌 우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복음을 가로막던 장애물은 더이상 장애가 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던 이틀 밤 정도는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일 아침, 곧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로 부터 보고 받은 후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부활을 허무맹랑한 일로 치부하려 했던 그들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길로 들어선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서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찾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 등 무덤에 찾아온 여자들에게 보이셨지만 주님이 찾아 나선 이들은 제자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이제는 영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 그들을 찾으신 것이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생각대로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걸어 잠그고 숨 죽인 채로 모여 있었다. 당장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노리는 다음 표적은 제자들인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에 수배령이 내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또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제자들을 붙잡기 위해 체포조를 보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으신 것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셨다. 이것이 꿈이 아님을, 복음이 참된 것임을, 부활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하지만 부활에 대해 여전히 제자 도마와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다행히 운이 좋은 편이다. 주님께서 직접 다시 찾아오셔서 못자국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 없는 증거를 주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는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못자국을 보여 주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부활이 우리에게 확실하지만 믿음 외에는 그리고 성경의 증언 외에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부활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순교를 당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A.D. 44 년 헤롯왕에 의해 참수 당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 안드레는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 터키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빌립도 터키에서 지독하게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힌 후 54년에 기둥에 매달려 순교당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구타 당해 순교했다. 도마는 태국과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인도에서 순교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유다는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톱으로 잘려서 순교당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던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을 갖게 된 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 죽음보다 더 강하고 더 가치있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부활을 믿으면 평안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한 메시지 가운데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다.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 주신 말씀이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부활은 곧 영원히 사는 삶이다. 그런고로 늘 부활을 꿈꾸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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