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30
[30] 기억되는 이름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첫 가정은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다. 첫 가정이기에 의미와 상징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요즘 젊은이들 말로 아담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애정하시는(adore, love)' 가정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로 이들은 결국 자기들의 고향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첫 가정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만드신 낙원과 인간 세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쫓겨난 가정에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주셨고 가인은 자라서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가인은 분노했다. 가인의 분노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가인은 동생이 드린 제물과 자기가 드린 제물의 차이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부분에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드렸기에 받으셨고 가인은 농산물로 드렸기에, 다시말해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거부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해석인 것 같다. 구약 율법에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곡식 제사도 합당하게 받으시는 분이시다. 또한 이때만 해도 아담의 가정에 제사에 대한 어떤 지침도 주신 것이 없었다. 율법이 제정되기 오래 전이기 때문이다.
(레2:14-15)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그의 제물이 거부된 참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제물이 거부된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문제를 지적하신 게 아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거나 죄를 행하는 행위 때문에 가인은 거절 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께 거부당했다는 불편한 마음 때문에 기회를 엿보다가 들판에서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 제물이 거부되었다고 동생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말아야 할 범죄이다. 결코 합리화 될 수 없는 범죄이다.
우리는 창세기 4장이 보여주는 아담 가정의 아픈 가족사를 통해 죄를 이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배워야 한다. 또한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에 대해 아담 부부는 무거운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되는 결말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담이 가인을 무섭게 질책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성경에는 아담이 질책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만약 가인이라도 지키기 위해 침묵했다면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뿌린대로 거두는게 하나님의 대 원칙이기 때문이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그가 감당해야 할 죄값에 대해 말씀하셨다.
(창4:11-12)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은 농사꾼이다. 그런데 땅이 열매를 내지 않고 수확할 수 있는 것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곧 평생에 저주를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가인은 사람들이 두려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게 되리라고 하신다. 이 또한 아벨을 죽인 죄에 대한 죄 값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목숨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창4:15).
아담과 하와 부부가 가인의 죄에 대해서 침묵했다 가정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의 상실감은 실로 컸을 것이다. 신앙심이 좋았던 작은 아들이 형제에 의해 살해 되었으니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였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로서 세상을 향하여 무한한 영적인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본다. 오늘 나는 죄에 대해 깨끗하다고 만족해선 안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간섭할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딤전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우리는 이 본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방관해야 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간섭하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번역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오역(誤譯, mistranslation)인 것이다.
NIV 영어성경은 'Do not share in the sins of others' 라고 본문을 번역했다. 그리고 한글성경이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한 헬라어 동사는 'Koinonei' 이다. 'Koinonei' 라는 말은 '나눠 가지다', 함께 하다', '참예하다', '함께 속하다' 는 뜻이다.
그런고로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해서 함께 죄를 짓지 말고 자신의 정결을 지키라는 것이다.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의 죄를 방관해선 안되었고 부모로서 강하게 징계를 했어야 했던 것이다.
신앙으로 살았던 아벨의 짧은 인생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평가한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영원히 기억하시고 그의 믿음에 대해 계속 말씀하겠다고 선언하신다. 수 천년 전에 형제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아벨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도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하겠다. 아벨처럼 수 천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삶이다. 장례가 끝나자 마자 잊혀지는 이름은 너무 슬프지 않을까? 우리가 아벨처럼 기억되는 삶을 사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믿음이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