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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누가 이웃인가?'

문학n천국 2022. 4. 26. 01:03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36

[36] 누가 이웃인가?

예수님께서 어떤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그 사람의 가진 물품을 빼앗고 옷을 벗기고 심하게 폭행한 후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을 버리고 사라졌다. 간혹 뉴스에서 보도되는 흉악한 강도 사건이다. 피해자는 아마도 예배를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왜냐하면 곧이어 그곳을 지나친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 곧 성직자들이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 여리고 성도는 예배의 감격을 품고 귀가하던 중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외진 곳에 들어섰을 때 강도가 나타났다.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것으로 볼 때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였던 것 같다. 은혜 받고 돌아가는 길에 웬 날벼락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의 가는 길에 강도가 매복하도록 방치하셨을까? 사경(死境)을 헤매던 그 성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배 참석을 후회했을까?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마침 그때 그곳에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사장이었다. 여리고 성도는 제사장에게서 도움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피해서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그 뒤에 레위인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 역시 신속히 그 자리를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믿음의 동지들이었지만 외면하고 지나갔다.

(눅10:31-32)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왜 이들은 어려움 당한 이를 외면하고 지나쳐 갔을까? 제사장이라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안되니까? 다른 급한 약속이 있어서? 두려워서? 이들에게도 물론 할 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변명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선을 행할 기회를 잃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잠시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쓰러진 자를 확인하고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는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다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눅10:33-34)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 사마리아인은 다음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여리고 성도를 부탁했다.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달라고 했다. 값을 더 계산하겠다고 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아마 며칠 안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었던 것 같다.

(눅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셨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마리아인이라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을 칭송할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너도 사마리아인 처럼 하라고 말씀하셨다.

(눅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누가복음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임을 말씀하고 있다.
(눅10:27-28)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남의 아픔과 상처를 공유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겉으로는 거룩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포장되었지만 이웃으로 하여금 더 절망하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여리고 성도가 받았을 영적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신앙에 대한 회의감마저 갖게 했을 수도 있다.

여리고 성도가 강도를 만난 사건은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그것은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자비로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눅6:33-36)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인자하며 자비를 베풀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고난 당한 자를 외면하는 것은 신앙적이지 않다. 우리는 눈 앞의 손해를 계산하지 말고 고난 당하는 자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욥이 고난을 당했다. 열 명의 자식들이 같은 시각에 죽었다. 11,500마리나 되는 많은 짐승들이 같은 시각에 폐사(斃死)했다. 우리가 아는대로 욥은 의인이었다.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욥1:21-22).

그런데 문제는 욥을 위로하러 온 오랜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거의 정죄에 가까운 말만 했다는 것이다. 위로와 정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욥4: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먼저이고, 치유가 먼저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참 이웃이 되는 것이다.

(약5:13-14)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