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2] 복을 흘려 보내라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서 군중들이 모여 들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요즘 말로 센세이션(sensation)이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각각의 질병을 고침받았다. 이제는 회당이나 성전에서의 집회는 공간적인 제약(constraint)이 따르게 되었다. 마치 광화문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건물 안에 수용할 수 없음과 같다.
어느날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순교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 들녘으로 가셨다. 사역의 쉼(break time)도 필요했고 제자들이 음식을 먹어야 할 짬을 낼 수도(Squeeze in) 없을 만큼 바빠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선(foot traffic)을 파악한 군중들은 벳새다 들판까지 따라왔다.
(막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시간은 흘러 날이 저물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흩어질 기미(sign)가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그리고 군중들에게 저녁을 먹이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예정에 없던 수천 명의 즉흥(Impromptu)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군중 속을 헤집고 다니며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가져온 작은 도시락 하나를 구해온다. 이게 음식의 전부였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벳새다에 쉬러 왔을 뿐이다. 아이의 도시락 안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 아이의 도시락임을 감안하면 누구 코에 붙일 수도 없는 크기다.
(마14:15-17)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예수님은 아이의 도시락을 들고 하나님께 축사(thank), 곧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이 작은 도시락은 예수님이 축사함으로 나눌수록 더 커져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 유대의 관습상 여자와 아이들은 계수(calculation) 되지 않았다. 만약 전체를 따진다면 이만 명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벳새다의 기적, 혹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마14:19-21)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준비된 것이 없음을 아셨는데도 말이다. 또한 지금 이 모임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잠시 쉼을 주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에게 많은 군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셨다.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들의 기록을 보면 오병이어에 필적할(an equal) 만큼 군중들을 배불리 먹인 제자, 곧 사도들은 없다. 제자 집단을 대표하는 베드로나 바울에게도 그런 기록은 없다. 물론 벳새다 들녘 같은 돌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군중들의 배고픔에 대해 책임적인 자세를 갖게 하셨다는 것이다. 내 배가 부르다고, 내가 허기지지 않다고 무관심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솔로몬은 잠언서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면서 손에 움켜 쥐려고 하지 말고 내 품에서 떠나 보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잠3:27-28)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그럼 내 것을 내어주면 내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한다. 오히려 윤택해지게 된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우리 고향 마을은 거의 백 여 세대가 모여 사는 제법 큰 시골 마을이었다. 1960~1970년대 당시만 해도 전기나 수도 설비가 대중화 되지 않았다. 전기는 1970년대 중반에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 수도는 물론 없었고 집마다 마중물(Calling Water)을 부어서 퍼올리는 작두샘이 있었다. 그리고 빨래는 마을 중앙에 있는 큰 샘터에 아낙네들이 모여서 손방망이를 두드려가며 옷의 얼룩을 뺐다. 세탁기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 그 샘에 가보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큰 사각형의 수조에 물이 항상 차고 넘쳤다. 아낙들이 빨래하느라 물을 많이 허비했음에도 다음날 가보면 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계속 지하에서 물이 솟아나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른들의 말씀에 물은 자주 퍼내야 샘물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샘물을 쓰지 않으면 샘은 결국엔 말라 버린다고 했다.
인생의 이치가 이와같지 않을까? 내가 움켜 쥐고만 있으면 썩게 마련이다. 계속 순환시켜야 썩지 않는다. 고인 물이 되면 악취(odor)가 날 수 밖에 없다. 물이 고여 있으면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썩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11:1-2)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근동지역에 대기근이 임한다. 극심한 기근(famine)은 칠 년이나 계속되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서 식량이 떨어졌다. 사람은 물론 동물들까지 아사(餓死,starvation)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요셉이 다스리는 애굽 땅에만 식량이 넘쳐났다. 요셉은 칠 년 풍년에 이어 칠 년 기근이 올 것을 예상하고 엄청난 곡식을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나라에서 곡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찾아왔다. 요셉은 나라의 창고를 개방한다. 칠 년 기근 동안 굶어 죽는 민족이 없도록 곡식을 내어준다. 이런 상황에서는 돈보다 곡식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요셉은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한다. 결국 칠 년 기근으로 인해 애굽은 더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애굽은 많은 민족을 살린 위대한 나라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이러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누리는 복이 흘러가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고, 더 상승된 가치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의 깨달음도 이런 것 같다. 그래서 베풀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또한 복 받은 자가 유의해야 할 일은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웃에게 복을 끼치는 일이 소중한 만큼 그들과 갈등하지 않는 것도 그들을 돕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이웃과의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평안을 해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잠3:29-30)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성경의 인물 가운데 욥이 모범이 된다고 생각한다. 욥은 빈민과 고아와 과부를 도왔으며, 맹인과 다리 저는 자와 억울한 자의 송사를 도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지도자들과 유지 그리고 망하게 된 자들도 욥을 축복했다고 말씀한다.
(욥29:8-17)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이웃과 갈등하지 않고 서로의 평안을 해치지 않으며 도움을 주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사탄 앞에서 욥을 가리켜 온전한 사람이라고 자랑하셨다.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솔로몬은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 솔로몬에게 있어 일천번제는 온전한 믿음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이것은 아무나 시도할 수 없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는 원인이었다.
솔로몬의 인생에 있어 일천번제와 함께 대표적인 헌신은 성전건축이다. 성전봉헌은 다윗왕의 평생의 소원이었지만 다윗이 아닌 솔로몬에 의해 건축이 이루어졌다. 다윗은 피를 많이 흘린 용사로서 피 묻은 손으로 거룩한 성전을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대상22:8-10a)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성전건축에 소요된 기간은 칠 년이었다. 또한 왕궁을 건축하는데 십 삼년을 소요했다. 다시말해 통치 기간의 절반을 건축사업에 올인한 것이다. 얼핏 훌륭한 업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십 년 동안 공사 현장에 동원된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칭송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솔로몬은 전국에서 삼만 명의 노무자를 모았고, 짐을 운반하는 사람이 칠만 명, 산에서 채석하는 사람이 팔만 명, 감독 관리자만 해도 삼천 삼백 명을 동원해서 건축을 마쳤다(왕상5:13~18).
물론 임금 지불이 되었겠지만 이십 년을 건축사업에만 올인한 것은 백성들의 삶에 고단함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자 북쪽 지파들을 중심으로 한 대표단이 왕에게 나아와 고통을 덜어주기를 간청한다. 이것을 르호보암 왕이 거부하자 북쪽 열 지파는 쪼개져 나간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는 순간이다. 나라가 분열될 정도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왕상12:3-4)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왕상12: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아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인지 솔로몬은 다른 사람의 평안을 깨지 말라고 권고한다. 자기의 정책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고단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복을 흘려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더 큰 가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평안을 깨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이것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