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7] 말(言)에 온전한 사람이 되라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함과 고발로 예수님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을 언도했다. 사형선고는 곧장 집행되었고 예수님은 골고다(Golgotha)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즘처럼 변호인의 도움을 받고 법리(legal principles)를 따졌다면 사형 판결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주로 정치범들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예수님은 정치범이 아니었지만 정치범의 올무(snare)를 씌워 정죄한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님은 강도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이 정죄를 받으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지만 당시 재판정에 있던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한 로마에 대한 반역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실은 총독을 향한 유대교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총독에 대한 로비(lobby)가 결실을 본 것이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재판은 잘못된 판결(judgment)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요즘 말로 사법 횡포(tyranny of justice)이다.
이 두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비난한다. 정말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강도의 도발(provoke)에 침묵하신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강도가 이 강도를 질책한다. 예수님의 행위는 다 옳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며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이 대화를 끝으로 예수님과 강도 두 사람은 유명(幽明)을 달리했으리라.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 곧 천국에 입성한 강도이다. 분명 죄인이었는데 그가 구원받은 것이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이 멀리 있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천국은 우리의 심장으로도 표현되는 마음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강도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만 있다면 천국은 당장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3:37-43)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원받은 강도는 비록 세상 법정에서는 정죄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다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죄한 다른 강도는 지옥불에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입에 독(毒)이 있어서 그 독(毒)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독설(毒舌)을 퍼부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잠언 10:6) '의인의 머리에는 복(福)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毒)을 머금었느니라'
(로마서 3:10-15)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성경의 인물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말에 있어 온전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물론 달변(達辯)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욥과 다윗이 아닐까 생각한다.
욥의 고난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욥처럼 죄와 상관없이 극한 고난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며 복을 거두어 가면 하나님을 저주할 거라며 도발한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욥을 저주하기 위함이 아닌 사탄의 판단이 틀렸음을 증명하고자 하심이었다.
결국 사탄은 욥의 열 명의 자녀들을 모두 죽였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고, 몸에 질병까지 얻게 했다. 불행의 극치(極致)를 경험하게 했다. 이쯤되면 욥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보통 세상을 원망하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욥의 반응은 너무 의외였다. 사탄이 기대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욕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 욥은 흔들림 없이 하나님께 신뢰를 보낸다. 인간 관계에서도 이 만큼의 신뢰를 보이면 관계는 돈독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욥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untouchable) 고차원의 신앙인이다. 요즘 말로 '넘사벽'(out of my league)이다.
(욥기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2:9-10)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십대 중반, 아마도 열 다섯 혹은 열 일곱 정도의 나이에 블레셋 군대의 골리앗 장군과의 맞대결에서 그의 목을 베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전쟁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위가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장인이었던 사울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백성들이 왕보다 다윗을 더 지지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장인과 사위 관계지만 사울은 정치적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고 암살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닌 기간은 13년 쯤이다. 남도 아니고 장인에게 쫓기는 사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다윗은 시편 57편에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편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편 57:6-7)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다윗도 상당히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다만 백성들이 더 많은 지지를 보낸다는 이유 하나로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도망자로 살면서 사울의 기습을 피하는 가운데 오히려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찾아 왔지만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너그럽게 대한 것이다.
다윗이 엔게디 동굴 안에 숨어 있을 때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마침 혼자서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왔다. 첫 번째 기회였다. 두 번째는 십 광야에서 추격 중 잠든 사울을 죽일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때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사무엘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사무엘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찾아 왔음에도 결국 죽이지 않고 더 오랜 세월 도망자로 살아간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자신이 직접 죽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무엘상 26:9-10)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입술의 말로 저주하지 않은 다윗은 참 신앙인이다. 옛날 어떤 어르신들은 남들을 저주할 때 '벼락 맞아 죽어라'(사투리 ; 배락 마저 디저부러라)고 했다. 입술로 정죄한 것이다. 하지만 욥과 다윗은 아무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입술에 파숫꾼을 세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입술에 독(毒)을 머금은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다.
우리는 그 혹독한 고난을 견디어 낸 다윗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의인이 나를 책망한다면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은혜로 여기겠다고 기도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겸손인가? 누군가 나를 책망하면 기분 나빠하고 되갚아 주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다윗은 달랐던 것이다.
(시편 141: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다윗의 이 겸손은 오랜 세월 하나님 체험을 통해 습득(習得)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다윗처럼 입술에 파숫꾼을 세우고, 책망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타인의 저주마저도 깨달음의 기회로 주신 것에 감사할 수만 있다면 온전한 사람이 되리라고 본다.
(야고보서 3:2,8)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