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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간증하기

문학n천국 2023. 4. 1. 21:39

< 뜬금없이..간증하기.>

2005년 2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만 8년 동안의 신학 공부 과정이었다. 다소 늦은 나이인 서른 살에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는 파릇파릇한 신학생 시절이었고 전임전도사 시절이었다. 꿈에 부풀어 2005.3.13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상가 3층을 임대해 교회를 개척했다. 철저하게 가난했던 시절이기에 교회와 사택을 따로 구할 수 없어 40평 되는 공간을 얻어 25평은 예배실로, 15평은 사택으로 개조했다.

개척 당시 아들은 여섯 살, 딸은 세 살이었다. 지금은 아들 24세, 큰 딸 21세, 막내딸 16세이다. 교회명은 은혜와 평강교회였다. 내 나이는 돌도 씹어먹을(?) 나이인 38세 였다. 개척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당일치기 왕복 10시간 운전도 거뜬(?)했던 시절이었다.

교회 월세는 월 130 만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모했고 너무 용감(?)했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 개척 응답을 받고, 기도하는 중에 보여주신 그 건물을 찾아서, 교회 이름도 환상 가운데 보여 주신대로 정했다. 난 희락교회로 이름을 정하고 주보까지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보여 주신대로 은혜와 평강교회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발바닥에 땀 띠 나도록 전도지를 돌렸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부흥되는 게 아니었다. 난 개척하고 부터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기도는 했었다. 나는 청계산에 올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배 시간과 전도 시간 외에는 산에 올라 기도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매일 10시간 이상 청계산 중턱에서 기도했다. 처음엔 산 정상까지 다녔는데 매일 오르다 보니 힘에 부쳐 중턱으로 기도 텐트를 옮겼다. 이제 개척한지 만 18년이 지났다. 지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하루 하루가 기적이었다. 하루를 살아낸 것에 감사했던 시절이었다. 다시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노 땡큐' 할 것 같다. 대인관계를 포기하고 살았다. 교회 아니면 산, 산 아니면 교회가 나의 유일한 행보였다.

당시 나의 일과를 소개하면, 새벽 예배 끝나고 오전엔 잠을 잤다. 그리고 점심 먹고 청계산에 올라 기도했다. 저녁 시간에 맞춰 하산했다. 저녁을 먹고 잠깐 눈을 붙였다. 밤 11시에 일어나 청계산으로 출발해서 산 중턱 텐트에 도착하면 자정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새벽 예배를 위해 4시쯤 하산했다. 나의 일상은 이게 전부였다. 더 이상 보태고 뺄 것은 없었다.

이렇게 삼 년을 기도했다. 거의 산(山) 사람, 혹은 자연인 같았다. 그 삼 년 동안 건물주에게 참 많이도 시달렸다. 월세를 제 때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맞지 않았을 뿐 세상 욕은 다 들었다. 쌍시옷(ㅆ) 들어가는 욕을 그때 다 배웠다. 건물주가 약사(藥師)였는데 욕을 감칠맛나게 참 잘했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기도 시작한지 삼 년이 지나던 어느 수요일이었는데 기도하고 예배 때문에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산 중턱에 웬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처음 뵙는 분인데 그냥 평범한 할머니셨다. 그 분도 기도하러 오신 모양이었다.

그 분이 저를 불러 세웠다. 그래서 송파에서 목회하는 김상용목사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때는 목사안수 받은 후였다. 그 분이 제게 대뜸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미국 LA에 사시는데 가끔 한국에 있는 딸 집에 다녀 가신다고 했다. 이번에도 한국에 들어왔다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기도만 하면 제 얼굴을 보여주시며 가서 이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분은 저를 삼 일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고 하셨다. 그 분은 오전에 다녀 가셨고, 나는 오후에 올라왔기에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삼 일 째 되는 날은 이 분이 오후에 올라 왔다가 나를 발견하신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 같다.

이 분이 제게 뭐가 힘든지 여쭈어 주셨다. 나는 그간 개척 3년의 대략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제 명함에 계좌번호를 적어 달라셨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겠다고 했다. 난 계좌를 적어 드리고 왔다. 다음 날 오전 전화가 왔다. 만나서 점심을 하자고 했다. 강남 어디로 오라고 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은행에 가자고 하셨다. 현금 2천 만원을 찾아 주셨다.

다음 날 또 전화가 와서 갔더니 3천 만원을 더 주셨다. 하나님께서 너무 적게 주었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런데 며칠 뒤 또 전화가 왔다. 갔더니 5천 만원을 주셨다. 너무 적게 주었다며 하나님께서 질책하셨단다. 그래서 세 번에 걸쳐 현금 일 억원을 받았다. 그간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었다. 교회도 5년 만에 건물 두 개 층을 임대해 이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LA에서 일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 계실 땐 남편이 우리은행장을 지내셨다고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들이 있어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난 지금도 산에서 하산하지 않았다. 거의 이십 여년을 산에서 부르짖고 있다. 물론 지금은 예전처럼 열 시간 이상은 기도하지 않는다. 그 절반 정도만 한다. 개척 십 년이 지난 후 부터는 하루 한 번 오후에만 산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척 19년 째, 교회가 부흥된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행복하다. 사람도 만나고,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여섯 권의 책도 쓰고, 비로소 하고 싶은 것을 조금씩 하며 산다. 신학교 가기 전 5년 동안 했다가 사업종료했던 작은 출판사를 얼마 전 다시 재등록하고 목회와 출판을 병행하고 있다. 글쓰는 재미가 꽤 쏠쏠하고 행복하다.

어느덧 쉰 여섯의 나이가 되었다. 과거 힘들었던 시간들이 내게 자양분(nutrient)이 되었다. 이제는 더 큰 비전을 품고 나아가고 있다. 요즘 청계산 등산로를 따라 벚꽃이 만개했다. 시각적으로 후각적으로 황홀한 시간들이다. 내 삶도 이렇게 꽃 피우게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오늘도 난 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