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11] 삶의 불편함까지도 감사하라
(잠언 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와 아무 상관없는 서해안 바닷가 마을이 내 고향이다. 요즘 전남 함평 주포 앞바다가 제법 알려져 있다. 해수찜으로 유명하다. 바닷물을 막아 그것을 끓여 온탕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몸을 담그면 신경통, 근육통, 피부병, 혈액순환 등에 좋다며 입소문을 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고향 바닷가 해수찜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내가 도시로 학교를 나간 뒤 시작된 어촌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해수찜의 대부분의 고객은 외지(外地)에서 오신 분들이다.
1970년 대 중반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농촌은 기계화(機械化)가 되지 않아 모든 농사일을 짐승, 곧 소가 도맡아 했었다. 논밭을 개간(開墾)하고 농작물을 실어 나르는 것까지 소가 담당했다. 소는 사람으로 말하면 머슴같은 존재였다.
우리 집에도 기르던 암소 한 마리가 있었고 대부분의 다른 가정에도 암소 한 마리 쯤은 기르고 있었다. 숫소는 새끼도 못낳는 것이 성질이 사나워 기르는 집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암소는 참 유순했다. 암소는 덩치가 커도 작은 아이가 고삐를 끌고가면 불평없이 어디든 끌려가 주었다. 고삐를 풀어 놓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소를 위해 여물(stover)을 무쇠 솥에 가득 넣고 푹 삶아 주셨다. 까끌한 식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소가 한번도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말을 못 배워서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눈을 치켜뜨고 째려보지도 않았다. 주인을 위해 그저 묵묵히 자기 몸이 산산조각 나기까지 내어 주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이런 충성스런 소를 위해 새벽에도 외양간(cowshed)에 가서 소의 평안과 안녕을 살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마움을 표현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농부는 이런 불편함을 오히려 즐긴다. 여물을 삶아 주고, 쇠 빗으로 털을 빗어 주고, 소 똥도 치워 주고, 가끔 돼지 뼈 국물도 우려내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소가 농부들의 수고로움을 많이 덜어 주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농부들에게는 소를 위한 고마운 불편함인 것이다. 농부 입장에서는 "땡스 카우(thanks cow)'이다.
만약 우리집에 이 암소가 없었다면 소를 돌보는 아버지의 수고로움은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많은 양의 농사를 짓지 못했을 것이고 한 해 동안 먹을 양식도 넉넉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말해 아버지의 불편함이 풍족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께 헌신하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는 것은 힘이 들지만 이 또한 주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운 불편함이다. 해외 선교지로 나가는 선교사님들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불편한 환경으로 뛰어 들어가시는 분들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또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는 이런 고마운 불편함을 몰랐다. 그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위한 헌신은 없었다. 그러다 편안하기만 했던 그들의 삶에 뱀이 등장한다. 뱀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다. 결국 이들 부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이들에게는 노동 명령과 출산의 고통이 수여되었다. 그간 누렸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창세기 3:16-17)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에덴에서 쫓겨나 땅을 일구며 살아가던 아담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그들은 첫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다. 가인의 뜻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다. 가인의 출생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이다.
(창세기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인간이란 힘듦을 통해 은혜를 깨닫는 존재인 것 같다. 불편함을 겪으면서 감사를 배워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삶의 불편함들은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암이나 중병에 들면 다른 가족들은 간호하느라 많이 지쳐가는 모습을 본다. 그러다 막상 환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면 남겨진 가족들은 엄청난 상실감을 경험한다. 가족들은 그래도 살아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한다. 수 년 동안 많이 힘들었을텐데 말이다. 삶의 불편함도 누군가에게는 감사의 제목이 되는 것이다.
닉 부이치치(Nick Vujicic, 1982~)라는 사람이 있다. '테트라 아멜리아 증후군(해표지증)'이라는 희귀병으로 태어날 때부터 팔 다리가 없었다. 그는 목회자의 아들이다. 학교에 입학하자 심한 따돌림을 당해 우울증을 앓았고, 여덟 살에 자살을 세 번 시도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으로 극복해내고 중고등 학교에서는 학생회장도 했다. 그는 열 다섯 살에 예수님께 삶을 드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한다. 양치부터 생리적현상 처리, 옷 입는 것 까지 한 시간 반 동안 혼자서 다 해낸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이 불편하지만 스스로 해낼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렇게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한 부이치치는 강연가이자 작가로서 전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팔 다리가 없는 사람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온갖 일상의 불편함도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는 것이 또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다윗은 고난이 자기에게 유익이었다며 고백한다.
(시편 119:71-72)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다윗에게 고난이 유익이었다면 우리에게도 유익할 것은 분명하다. 그럼 왜 고난이 유익한가? 이것을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길어지고 복잡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말하면, 극심한 고난일수록 세상에 한 눈 팔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쉴 새 없이 휘몰아 칠 때는 다른 곳에 눈길을 줄 수 없음과 같다. 고난은 덜 중요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야곱의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뒤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먼 땅 밧단아람에 있는 외갓집으로 도망을 간다.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 야반도주(夜半逃走)하듯이 도망쳤다. 자신이 속여 빼앗은 모든 것은 결국 하나도 자기의 것이 되지 못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이십 년을 일했다.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그는 고백한다. 고생 끝에 그는 외삼촌의 딸들과 여종들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네 명의 부인들을 통해 12남 1녀를 낳았다. 재산도 넉넉해졌다.
(창세기 31:40-41)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야곱은 이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고향에 가까워질 때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마주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야곱은 주저앉고 만다.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오는데 고향 땅을 밟기도 전에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밤, 하나님의 사자(Angel)가 그를 찾아와 주셨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 축복하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며 억지를 부린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친다. 그것으로 인해 야곱은 갑자기 절뚝발이가 되었다. 허벅지 뼈가 탈골되었으니 이젠 누가봐도 장애인이다.
(창세기 32:24-26)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는 떠나버린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큰 소득없이 지체장애를 갖고 말았다. 야곱은 '아뿔싸,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괜히 싸움을 걸었다가 정형외과 환자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심란했을까? 원하는 바는 얻지 못하고 평생의 장애만 얻고 말았다.
그 사이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야곱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로 절뚝거리며 걸어가 일곱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에서는 야곱이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마음 속 분노를 거둬들인다.
아마도 형 에서 입장에서는 동생 야곱이 지난 이십 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으면 다리를 못쓰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러 왔다가 오히려 야곱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형제로서 안아준다.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분노가 사라진 에서는 야곱이 그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이것으로 형제간의 일은 잘 마무리 되었다.
(창세기 33:3-4)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세기 33:12,16)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살리신 방법은 허벅지 관절 뼈를 탈골시키는 것이었다. 제대로 장애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아픈 척 하지 못하게 진짜 장애인을 만들어 버렸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결국 이것 때문에 야곱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혹 우리에게 불편한 몸이나 환경을 주셨다 해도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그것까지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 삶의 불편함들은 새 은혜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