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13] 병(病)에게 지지 말라
(잠언18:14)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The human spirit can endure in sickness,
but a crushed spirit who can bear?)
세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서 군의관(軍醫官)들이 찾아낸 새로운 질병이 있었는데 일명 ‘가시철망 병(Barbed Wire Sickness)’ 이다. 이 병은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안찌며, 결국 온 몸이 쇠약해져서 누워만 있으려는 증상을 보이는 병이다. 당시에 이 병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치료 방법 또한 없었다. 단지 철망 속에 갇혀 있을 때 오는 병이라고 해서 ’가시철망 병‘이라고 명명(name)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 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병에 걸리지 않았다. 이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하루 종일 그 가시철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탄식하는 사람만이 그 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철망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보고 고향을 생각하며 내일을 꿈꾸는 사람 그리고 철망 밑에서 피어나는 작은 한 송이 꽃을 기뻐하던 사람은 그 병에서 자유로웠다고 한다.
병(病)에게 지지 말라는 말은 어떤 병에서든지 반드시 완치 판정을 받아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며, 그것 때문에 자기 일에 게을러지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도지만 자기에게 있던 안질(眼疾)이나 간질(癎疾)병을 죽는 날까지 안고 살아갔다.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것을 핑계삼아 쉬지 않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며 더 열심을 냈다. 오히려 질병이 사도 바울의 열정을 자극했다.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수십 년을 제자훈련에 헌신했던 옥한흠 원로목사는 4년 동안 폐암으로 투병하다 2010년에 72세로 소천했다.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고통을 완전히 면제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없다. 오히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였고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셨다고 말씀했다(전 7:14).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이다. 우리가 번민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고통이 주는 독소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中에서 >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형통할 때도, 병들어 삶이 버거울 때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락(福樂)을 소망하며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 중증환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은혜를 주신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성경에 문둥병자로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 있는데 아람국의 군대장관 나아만이다. 아람은 오늘날 중동국가인 시리아이다. 과거에 문둥병(leprosy)은 저주받은 병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주사요법으로 완치까지도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문둥병(나병, 한센병)은 피부가 문드러지는데도 감각의 소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병이다.
그런데 나아만은 문둥병자임에도 왕의 총애를 받는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다. 그의 능력이 출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어느날 아람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보내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유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에게 자기 신하의 치유를 부탁한 것이다.
(열왕기하 5: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왕이 직접 나서서 신하의 병을 고치려 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나아만이 어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그가 얼마나 충성되었는지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결국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나아가 문둥병을 치유받는다.
(열왕기하 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그럼 나아만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문둥병을 개의치 않았을까? 아마도 컴플렉스(complex)를 극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온전한 사람도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데 나아만은 오죽했을까? 그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군대장관의 자리였을 것이다.
나는 나아만의 삶의 태도를 말하고 싶다. 치명적인 약점일 수도 있는 문둥병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함몰(sinking)되지 않기 위해 그는 고군분투(struggling)했을 것이다. 나아만은 정말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둥병자가 왕의 오른팔이 되기까지는 고난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만처럼 질병 앞에 주눅들지 않고 문둥병마저도 자기 인생의 액세서리(accessory)처럼 여길 수만 있다면 좋겠다.
또한 나아만은 단지 그가 이방 나라의 군대장관이라는 이유때문에 하나님께 치유받은 것은 아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문둥병자이지만 마음에 세상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문둥병 앞에 무너지지 않았다. 심령이 강해야 병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간질병 때문에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예고없이 찾아오는 발작(seizure)으로 인해 거품 물고 쓰러질 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더구나 전도하다가 설교하다가 쓰러지면 얼마나 정체성(identity)에 혼란을 겪었을까? 또한 군중들 가운데 '너나 잘하세요' '네 몸이나 챙기세요' 라며 비아냥거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상황까지도 기뻐했다고 고백한다. 심령이 강한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고린도후서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The human spirit can endure in sickness,
but a crushed spirit who can bear?'(잠18:14)
사람은 심령이 강해야 모든 것을 견디고 이길 수 있다. 요즘은 비슷한 표현으로 멘탈(mental)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멘탈이 강하다, 멘탈이 약하다 라고 말하곤 한다. 멘탈이 약한 사람을 유리 멘탈, 크리스탈 멘탈이라고 비하(卑下)하기도 한다. 유리나 크리스탈은 너무 쉽게 깨어지기 때문에 빌려 온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심령이 강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에 기초하여 마음이 견고하다는 의미이다.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의연할(serene)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심령이 강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멘탈갑' 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자 로마 군병들의 창칼이 무서워 '나는 예수를 모른다' 며 세 번 부인했다. 베드로의 칠십 평생에 가장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통곡한다. 아마도 예수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과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한 회한(remorse)이리라. 이것이 제자 베드로의 초기 모습이다.
(마태복음 26:74-75)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목격한 후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이제 죽음 따위는 그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했다. 베드로는 70세 쯤 순교했는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자청(自請)했다고 한다. 주님처럼 십자가에 반듯하게 달리는 것 조차도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순교의 시간을 마주한 베드로의 심령은 강해져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베드로처럼 씻을 수 없는 실수를 범했다고 해서 스스로 낙담하는 것은 금물이다. 어려울수록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회복으로 가는 첩경(捷徑)이기 때문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로마에 팔아버린 사건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구설(口舌)에 오르내리고 있다. 베드로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표자로서 손색없는(inferiority) 사역을 했다. 베드로다운 사역을 했다. 실수는 반복하지만 않으면 약(藥)이 된다고 생각한다.
(잠언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암(癌)같은 질병에 붙잡혔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내 삶의 소중한 것을 잃었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병(病)에게 지지 말고, 마귀의 유혹과 공격에도 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기고 또 이길 수 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