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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저주는 안된다, 오히려 축복하라

문학n천국 2023. 5. 6. 20:50

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16] 저주는 안된다, 오히려 축복하라

(잠언 20: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If someone curses their father or mother, their lamp will be snuffed out in pitch darkness'

외나무 다리에서 산양(山羊) 두 마리가 마주치게 되었다. 싸워서 건너가야 하나? 뒤로 돌아가야 하나? 다리가 좁아서 뒷걸음질 하기는 힘들었다.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든지, 아니면 물 속에 스스로 입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 이렇게 서로 눈치를 살피던 중 갑자기 한 마리가 엎드렸다. 그러자 다른 한마리가 그 위를 밟고 먼저 건너갔다. 그러나 엎드린 산양을 밟고 먼저 지나간 산양은 이긴 게 아니다. 엎드린 산양에게 배려(配慮)를 받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남을 이겨야만 되는 줄 안다. 물론 남을 이김으로 기분은 업(up)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기 기분일 뿐이다. 배려(consideration)를 해주는 쪽이 배려를 받는 쪽 보다는 심리적 우위(優位,superiority)에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적 우위는 마술사들이 쓰는 정신적 기법이다. 이게 안되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없다고 한다.

근래 '심리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많이 말한다. 우리는 돈과 관련한 '경제적 자본'만 생각하지만 성공하기 위해선 "심리적 자본'이 중요하다고 한다. '심리적 자본'이란, 쉽게 말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이해도(self-understanding)'라 할 수 있다.

이 개념을 좀 어렵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심리적 자본'은 자기효능감, 희망, 낙관주의, 회복탄력성 등 네 가지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한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말하는 자기효능감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인 희망, 좋은 일은 더욱 커지고 나쁜 일은 일시적일 것이라 생각하는 낙관주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이다. 이런 '심리적 자본'을 가진 사람은 더욱 진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여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는 개념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경제적 자본'이 없으면 '심리적 자본'이 많아야 한다고 본다. '심리적 자본'은 곧 '긍정 마인드(positive mind)'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노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고 생각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인류가 대홍수로 멸망하고 노아의 가족 8명, 곧 네 가정으로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아와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세 명의 며느리들에 의해 민족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대홍수가 끝나고 노아는 포도를 재배했다. 그리고 어느날 포도주를 마시고 크게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과거의 단정하던 모습의 노아가 아니었다. 흠이 없던 모습은 사라진 것 같았다.

(창세기 6:9-10)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세기 9:19-21)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잠이 든 것을 발견한 것은 둘째 아들 함이다. 그나마 며느리들의 눈에 먼저 띄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함이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벌거벗고 잠들었다고 말한다. 그냥 아버지께 이불을 덮어 드리고 나왔으면 될 일이었다. 얘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드렸다.

(창세기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술에서 깬 노아는 자신의 수치를 덮어 주지 않고 형제들에게 고자질한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해 버리고 만다. 그것도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자 노아의 손자이다.

(창세기 9: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 사건을 끝으로 성경은 더이상 노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완벽했던 신앙인의 아쉬운 퇴장(leaving)이다.

(창세기 9: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노아의 둘째 아들 함에게 부족했던 것은 배려(配慮)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보다 덮어주는게 마땅했다고 본다. 그리고 노아는 자신의 허물이 드러난 것에 대한 반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없이 자식을 저주해 버리는 흠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것은 노아가 '경제적 자본'은 갖추었을지언정 '심리적 자본'은 결여(lack)되어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적 자본'은 갖추지 못했지만 '심리적 자본'이 풍요했던 사람이 있다. 욥바에 살고 있던 여제자 다비다(Tabitha)이다. 다비다는 풍족하지 못한 생활에도 바느질 재능이 있어서 속옷과 겉옷을 많이 만들어 가난한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도행전 9:36-40)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이렇게 '심리적 자본'을 풍성히 가진 사람이 많아야 따뜻한 세상이 된다고 본다. 다비다는 병들어 죽었지만 많은 과부들의 바램대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노아처럼 '경제적 자본'만 있고 '심리적 자본'이 없어 자식을 저주해 버리는 사람보다는 다비다처럼 '경제적 자본'은 없지만 '심리적 자본'이 풍성하여 가난한 과부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식이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논할 가치도 없는 문제다. 특히 유산 문제나 어릴 적 학대 당한 경험으로 부모를 저주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문제이다. 저주는 신(神)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주술사 발람 선지자를 매수한 사람이 있다. 모압왕 발락이다. 그는 돈을 써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

(민수기 22:4b-7) '그 때에 십볼의 아들 발락이 모압 왕이었더라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민수기 23:7)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발람 선지자에게 나타나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민수기 22: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저주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만약 인간의 저주가 효력이 있다면 세상 질서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축복하는 것이다. 원수까지도 먹이고 돌보는 것이다.

(로마서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19-20)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축복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나를 아프게 했다 해서 이웃을 저주할 수는 없다. 저주는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우리는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부터 형제 그리고 이웃을 축복하도록 존재할 뿐이다. 마치 우리가 주님께 받은 것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사랑하여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 주고자 했다. 어찌하든 진심으로 바울을 돕고자 했다. 우리도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갈라디아서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