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20] 하나님을 돕는 자가 되라
(잠언 23:17-18)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고난을 겉옷처럼 늘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찬양을 소개한다. 찬양사역자 소진영 간사의 <나의 한숨을 바꾸셨네>이다. 이 곡은 소진영 간사가 작사, 작곡했다. 그 노랫말의 일부이다.
"고달픈 삶에 은혜도 무뎌지고, 곧 사라질 것에 내 맘 두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바라보네, 그 은혜를 놓치며 살았네,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며, 날 붙드신 주 예수를 보네, 사랑 가운데 놓인 나의 삶을, 날 건지신 그 이름 예수,
나의 한숨을 바꾸셨네, 주를 향한 노래로 소망의 노래로, 나의 눈물을 거두신주, 예수 이름 안에 살아가게 하소서, 나의 한숨을 바꾸셨네, 나의 눈물을 거두신 주, 예수 이름 안에 살게 하소서, 예수 이름 안에 살게 하소서, 예수 이름 안에 살게 하소서"
삶이 내게 호의적(好意的)이지 않고, 고통 가운데로 나를 밀어 넣을 때 우리는 '한숨 짓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내용의 찬양이다. 오히려 한숨(sigh)을 기쁨과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고백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100세와 9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불임(不姙) 부부로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던가? 이들 부부는 수십 년 동안 자식이 없음으로 크게 상심해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심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창세기 21:5-6)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노년이 되어서야 아들을 주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 의한 아들임을 그들이 인정할 수 있기 까지 기다리신 것 뿐이다. 만약 사라가 젊어서부터 많은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링컨(Abraham Lincoln)의 말을 빌려 각색(dramatization)하면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of the man, by the man, for the man) 출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백 세에 겨우 얻은 아들 이삭은 그들에게 있어 약속의 자녀가 분명했다. 사라가 불임이었고 경수(menstruation)가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해피엔딩(happy ending)이다. 결국 사라는 90세에 아들을 낳은 건강한 미세스(Mrs)가 되었고, 아브라함은 100세에도 활력있는 미스터(Mr)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약성경에 아삽(Asaph)이라는 인물이 있다. 레위인으로서 헤만, 에단과 함께 다윗 왕 시대에 성전 찬양대 지휘자이다. 그리고 시편 총 150편 가운데 12편(50,73~83)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아삽은 신앙이 검증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큰 영적인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유인즉 죄악을 행하는 악인들이 신앙인들 보다 더 잘되고 평안하고 죽을 때도 고통없이 가는 것을 보고 회의감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잘 되어야 순리(順理)인데 반대로 악인이 더 잘되고 의인의 삶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편 73:2-5)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렇다. 이건 신앙인의 입장에서 정당하지 않은 결말이다. 정직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 살아야 공의로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아삽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도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저주 받아야 마땅한 악인들이 복을 누리는 것은 분명 정의(正義)의 오류(誤謬)이고 창조질서의 오류(error)인 것이다. 아삽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해 혼란스러워 할 때 하나님은 잠잠하셨다. 그러다 아삽은 성전에 들어가서야 악인들의 결말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악인들에게는 갑자기 종말이 임하게 하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편 73:16-19)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악인들이 가는 길은 미끄러운 길이고, 파멸의 길이다. 악인들에게는 재앙이 늘 예비되어 있다. 평안한 듯 보이지만 위태롭고, 잘 사는 것 같지만 곧 파멸할 존재이다. 황폐함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신앙인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따스하고,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아삽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다. 그래서 삶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늘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 37:1-3)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우리는 악인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악인의 성공을 쫓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 길의 끝에는 낭떠러지(cliff)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떨어지지 않으려 버텨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심판의 불 구덩이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狹窄,confined)하다.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비좁은 길이 곧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넓은 길로, 쉬운 길로 가려 한다. 그들은 오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간다.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다. 우리는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그들이 걸어간 길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소망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There is surely a future hope for you,
and your hope will not be cut off'
팔레스타인의 해안 도시인 가이사랴에 이달리야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달리야대(Italian cohort)는 로마 군대를 지칭한다. 당시 가이사랴에는 로마 총독 관저가 있었다. 그곳에 백부장 고넬료가 있었다. 백부장은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다. 우리 군대의 중대장 쯤 되는 장교이다. 이 사람은 이방인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1-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섬김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내 그와 그의 온 가정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모든 가족과 친지들을 구원해 주셨다. 이렇게 어디에서든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고 돌보아 주신다.
(사도행전 10:44-46)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엘리야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가장 악한 왕 아합의 통치 시대였다. 아합은 왕비 이세벨과 함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숙청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를 자기들의 신으로 섬겼다. 이렇게 숙청 작업이 계속될 때 하나님의 선지자 백 명을 몰래 동굴에서 먹이고 보살핀 사람이 있는데 아합왕의 궁내대신 오바댜이다. 그는 비록 악한 왕의 신하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돌보았다.
(열왕기상 18:3-4)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한 명도 아니고 백 명을 돌보는 것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발각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들과 하인들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다. 오바댜는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울지언정 하나님을 돕는 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성공과 맞바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헌신된 자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신다. 성경은 오바댜의 이후의 삶을 더이상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장담하건대 그의 가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셨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이렇게 훌륭한 평신도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오바댜처럼 순교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사람을 세상이 어찌할 수 있을까? 아차하면 믿음을 던져버릴 '날라리(party animal)' 신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신앙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면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이 그의 삶을 돌보신다. 평신도 오바댜처럼 하나님을 돕는 자가 되라.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