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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인생 자충수를 피하라

문학n천국 2023. 6. 8. 14:34

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24]  인생 자충수(自充手)를 피하라

(잠언 26:27)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자충수(自充手)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행동이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도 한다. 축구 경기로 말하면 자살골(own goal)이다.

옛 로마에 <페릴루스의 소> 라는 놋쇠로 만든 소 모양의 처형 기구가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의 왕이었던 팔라리스가 조각가 페릴루스에게 독특한 처형 기구를 만들라고 명령한데서 비롯되었다. 처형 기구를 완성한 페릴루스는 팔라리스 왕에게 기구에 대해 설명했다.

'놋쇠 소의 몸에 있는 문을 열고 죄인을 집어 넣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놋쇠 소의 밑에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때면 놋쇠는 금새 빨갛게 달아 오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죄인은 고통에 소리를 지르다 죽게 되는데 그 소리가 소의 울음소리와 같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팔라리스 왕은 조각가 페릴루스에게 아주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며, 가장 먼저 네가 들어가 보라며 그를 놋쇠 소에 잡아 넣었다. 그리고 장작 불을 때니 정말 그의 말대로 소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페릴루스는 자기가 만든 처형 기구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칠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팔라리스 왕이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의 폭정에 시달렸던 시민들은 팔라리스를 그 놋쇠 소에 가두고 장작 불을 때 죽이고 말았다. 팔라리스 왕 또한 자신이 제작을 지시한 그 놋쇠 소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경우를 자충수(自充手)라고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100세와 90세의 노인이 되기까지 자녀를 얻지 못했다. 사라의 불임(不姙)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몇 살에 결혼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다만 훗날 태어난 아들 이삭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고, 리브가 또한 불임(不姙)으로 20년이 지난 60세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얻었다. 만약 아브라함도 40세 쯤 결혼했다고 가정한다면 결혼 후 60년이 되도록 아내 사라가 출산하지 못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고향 땅 하란을 떠나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이었다. 자식 하나 없는 불임 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씀이었다. 이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 하지만 이 언약의 말씀을 받고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사라는 여전히 임신하지 못했다.

이쯤되니 아브라함도 사라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나이가 85세와 75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라는 남편에게 자기 몸종 하갈을 첩으로, 곧 대리모(Surrogate mother)로 주며 아들을 낳을 것을 제안한다. 우리 옛 고전 영화에 등장하는 씨받이 역할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여종 하갈은 단번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렇게 하갈이 쉽게 아들을 낳은 것과 달리 사라는 60년 가까이 출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사라가 겪었을 심리적 고통이 무척 컸을 것이다.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은 86세였다.

참고로 사라가 127세에 죽고 난 후 아브라함은 후처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름은 '그두라'이며 그두라는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창25:1-2). 본처(本妻)는 불임으로 고생했지만 후처(second wife)는 자식들을 쉽게 낳았다는 점은 생각을 좀 복잡하게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지 38년 후 175세에 세상을 떠난다.

(창세기 12:1-2,4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6:1-3)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여종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은 별탈없이 잘 자랐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하갈의 태도이다. 아브라함이 부득이 그녀를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여종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갈이 여주인 사라 앞에서 거만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주인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나타냈다. 사라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도 그럴것이 여종이 여주인을 향하여 '애도 못낳은 것이' 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조직으로 말하면 하극상(下剋上)도 서슴치 않으려는 하갈의 태도에 사라는 화가 났다.

(창세기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러나 사라는 남편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어는덧 세월이 흘러 이스마엘이 열 네살이 되었을 때, 곧 아브라함이 백 세, 사라가 구십 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마침내 아들 이삭을 낳았다.

(창세기 21: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그런데 문제는 이스마엘이 아기 이삭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이스마엘이 동생 이삭을 사랑하고 아껴 주었다면 성경에 기록된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모전자전(母傳子傳), 이들의 태도에 사라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삭이 젖을 떼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들 모자를 쫓아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어린 이스마엘이 염려되어 망설였지만 이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보낼 것을 말씀하신다.

(창세기 21:11-13)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방황한다. 젊은 여인과 어린 아들이 광야에서 방황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들짐승도 위험요소이고, 낯선 사람도 위험요소이다. 그리고 가져온 물마저 떨어졌다. 이제는 들짐승의 위험보다 탈수(脫水)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하갈은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통곡한다. 여주인을 멸시한 여종이 겪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같은 시각 사라와 이삭은 모자지간(母子之間)에 비로소 찾아온 행복을 만끽하고(enjoy) 있었다.

(창세기 21:14-16)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광야 들판에서 아이의 울음소리에 귀기울이신 이가 계시니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어미 하갈에게 샘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갈 곳을 지시하신다.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광야에 버려졌지만 바란 광야로 이동하여 정착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현재 아랍민족의 조상이 된다. 이슬람, 곧 무슬림(Muslim)의 시작이 이스마엘이다.

(창세기 21:17,19)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세기 21: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하갈의 삶을 보면서 감사하며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여주인 앞에 겸손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상황이 달라졌을거라고 본다. 쫓겨나지 않고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며 살았을거라 믿는다. 다시말해 하갈의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욕심이 불러온 고난이었다는 생각이다.

함정(pitfall)은 남이 파놓은 구덩이를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스스로 함정에 빠져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하갈이 그런 예(例)라고 생각한다. 하갈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황량한 광야로 내몰렸던 것이다.

하갈은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첩으로서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애굽 여인이었지만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주인을 멸시하고 교만함으로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인생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인생의 위기로부터 지켜주신다. 이 축복의 약속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갈처럼 인생 자충수를 두지 말고 인생 명승부를 펼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