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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거시기 하자

문학n천국 2023. 7. 8. 17:16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3] 거시기 하자

영화 <황산벌,2003>의 내용이다.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오지명扮)은 계백장군(박중훈扮)과 독대하며 술을 몇 차례 권하고 나서 어렵게 입을 연다. '니가 거시기 해야겄다'. 계백은 이 말을 알아듣고 거시기 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리고는 그의 처자를 칼로 베고 황산벌로 나가면서 군사들에게 죽기까지 싸우기 위해 갑옷을 벗지 못하도록 꿰맬 것을 지시하면서 '갑옷을 거시기 해라' 라고 명령한다.

신라군과의 일전(一戰)을 앞둔 백제군을 모아놓고 계백 장군은 소리친다. '황산벌에서 우리가 머시기 하기까지 갑옷을 거시기 해부러라!' 신라군 첩자가 이 말을 엿듣고 김유신(정진영扮) 장군에게 보고하자 신라군은 ‘거시기’를 암호라고 판단하고 이것을 해독하려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는 내용이 등장한다. 백제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신라 사람들은 해석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실제로 전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대부분 ‘거시기 머시기 저시기’ 하면 대화에 막힘이 없이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 언어문제로 대형 사건이 일시에 종료되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바벨탑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은 노아의 홍수 후(後) 106년이 지나서, 다시말해 노아의 5 대손(孫) 벨렉이 태어났던 해(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창세기 10장 25절에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Two sons were born to Eber: One was named Peleg, because in his time the earth was divided; his brother was named Joktan')

홍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특히 홍수 심판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평지에서 제작되었던 노아의 방주가 해발 5,100m의 아라랏산 꼭대기에 머문 것으로 보아 최소 그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2의 노아의 홍수에 대비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의 결과물이 바벨탑이다. 가능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건물을 지어 멸망을 피하려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람들을 한 마음 한 뜻이 되게 했다. 아마도 바벨탑 건축을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모두가 바벨탑 같은 안전장치(safeguard)가 자기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창세기 11:2-4)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돌을 대신해 벽돌을 구웠다. 그리고 진흙을 대신해 역청을 사용했다. 역청은 오늘날 끈적이는 검은색 액체인 아스팔트(asphalt)이다. 벽돌과 역청을 사용했다는 것은 시날평지(a plain in Shinar)에서 돌이나 진흙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반증(反證)일 것이다.

그들에게 바벨탑 건축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수고를 누가 감히 헛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바벨탑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시도를 하나님께 맞서려는 행위로 판단하셨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시쳇말(buzzword), 곧 요즘 세상 말로 '한번 눈뜨고 당했으면 되지 두 번은 안 당한다' 는 인간들의 선언이 바벨탑 건축이었다. 그들은 노아의 홍수 때 시간당 5,300mm의 비를 내리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잊고 있었다. 그래서 벽돌로 성읍과 탑을 쌓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한 듯하다.

바벨탑은 바닥 면적이 가로 90m × 세로 90m이고, 높이 또한 90m로 8단의 건축물인데 탑이라기 보다는 푸딩 모양의 큰 빌딩이라고 하는 게 맞다. 오늘날로 하면 축구장 면적의 바닥 위에 30층 높이의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니 많은 인력과 건축자재가 소요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쌓고 있는 바벨탑을 보시기 위해 강림하셨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쌓아올린 바벨탑에 대해 관심을 두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바벨탑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저항(resistance)임을 아셨다.

(창세기 11:5-6)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을 중단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허를 찌르는(catch off guard) 방법을 행하셨다. 바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confuse) 하신 것이다. 일심으로 바벨탑을 건축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학연수를 받지 않았지만 마치 모국어를 사용하듯이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세상 말로 미치고 펄쩍 뛸 상황이었다. 어제의 동역자가 하루 아침에 이방인이 되고 만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공사를 계획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결국 건물을 세우는 공사는 중단되었다. 바벨(Babel)은 히브리어로 '혼돈'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혼돈의 상황을 내리셨기 때문에 붙여진 건물 이름이 바벨탑이다.

(창세기 11:7-8)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1세기 유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인간 최초의 왕 니므롯(Nimrod)이 대홍수와 같은 신의 심판에 대비해 홍수로부터 안전한 높은 탑을 쌓으려 했다고 전한다. 바벨탑 건축을 니므롯이 주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니므롯은 고대 앗수르의 최초의 왕이다.

현대 인류학은 모든 민족은 원래 한 민족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여러 언어에서 나타나는 발음의 유사성(likeness)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 '엄마'와 영어의 'mom(맘)', 프랑스어의 'maman(마만), 러시아어의 'mama(마마)'가 유사한 발음을 가지고 있고, 한국어의 '아빠'는 영어의 'papa(파파)', 드라비다어 'appacchi(아파치)', 독일어 'Vater(파터)', 프랑스어 'papa(파파)'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진 사람들의 언어가 외계어처럼 전혀 생소한 언어가 아닌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추측일 뿐이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온 땅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다. 그리고 약 삼백 여년(?)이 흘러 아브라함이 등장하기까지 성경은 어떤 사건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얘기를 하기 위해 긴 세월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연대가 학자들마다 차이가 있어 시기는 추정할 뿐이다.

바벨탑, 사실은 대형 건물인데 이것을 중단시킨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엄중하게 징계하신 것은 백성들의 계획과 시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인데 이 목적에 역행한 것이다.

(창세기 11:5-6)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머물러야 한다. 사실 이것이 행복이다.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양(羊)은 안전하다. 주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우리를 벗어나는 양(羊)은 곧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가 가장 평안하고 행복하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배반하려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공사를 중지시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떠나려는 백성들을 붙잡으신 것이다.

(누가복음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을 떠나려는 인간들의 시도는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 심지어 의인 중에 의인이었던 욥(Job)에게 사탄이 찾아와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부추긴 사건은 유명하다.

(욥기 2:6-9)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바벨탑을 쌓는 수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결코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도 결코 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흩어짐을 겪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사야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