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13] 힘들어도 가야 한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2011)라는 시다. 인생이란건 살아가는 것이다.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백 세에 독자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었다. 이들은 부자(父子)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아버지와 아들로 지목한건 아니다. 낳고 보니 아들이 이삭이었고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지목해서(point out) 부른 것이 아니라 내게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나와 동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명자들이다. 내가 그들을 아껴 주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산 속 암자(庵子)로 숨어 들어간 종교인들은 이웃과의 동행의 사명을 거스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들에게 욕(辱) 먹기 딱 좋은 주장일 수도 있다.
따라서 고의로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악(惡)이 아닐까 한다. 배신이 바로 그것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로마 총독에게 팔았는데 이 일로 제자공동체는 산산조각 났다. 제자들을 포함한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큰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제자 중 일곱 명은 본래 생업(生業)이던 어부생활로 돌아갔다. 그런고로 은(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제자공동체를 파괴하고 제자들을 흩어지게 한 가룟유다의 죄는 무겁다고 하겠다. 가룟유다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지만 죄 값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마태복음 27:3, 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삭이 태어나고 십 수년이 흘렀다. 이삭은 어느덧 청소년기의 소년이 되었다. 이삭은 크게 상처받는 일 없이 잘 성장했다. 아브라함(Abraham)도 부인 사라(Sarah)도 하나님과의 관계나 대중적인 관계에 문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평안과 안정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계자로 자리매김 해 갈 무렵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Mt. Moriah)에 데려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다. 단 한번도 불행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브라함은 심령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어찌 자식을 죽여 짐승처럼 제사를 드린다는 말인가? 보통 사람 같으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창세기 22:1-2)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러나 성경엔 어떤 설명도 없다. 아브라함이 반항했다든지, 하나님을 욕 했다든지, 신앙을 내팽개쳤다든지 하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순종이다. 반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이 사건에 대해 듣는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학대(abuse)했다며 비난할지도 모른다. 자식을 죽여 제사를 드리라는 요구는 부모에게 결코 요구해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윤리(倫理)를 모른다며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브라함은 외적으로는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창세기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었다. 차라리 한 시간 거리면 갈등이 덜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의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렇다고 체념(諦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내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과 이삭은 번제단을 쌓는다. 이삭이 번제물에 대해 질문했지만 아브라함은 에둘러 말한다(talk around).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으리라 말한다. 그러나 본래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게 아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준비할 물품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포박하여 죽이려는 장면이다.
(창세기 22:7-8)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세기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를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은 점이다. 이미 백 십세가 훨씬 지난 고령의 아브라함을 얼마든지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십대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삭은 그저 아버지 뜻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뢰이며 존경인가?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길을 걸어가신 것과 같다.
이삭이 번제로 드려질 때 이삭의 나이는 십대 중반 혹은 이 사건 이후에 어머니 사라의 죽음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37세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서두에 말한대로 10대 중반이었을거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40세 가까이 된 약간 늙어가는 느낌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때로 오염되었을 나이(Age)기 때문이다.
(창세기 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게 하신 것과 이 명령을 아브라함과 이삭이 한마디 불평도 없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를 속여가면서 말이다. 하나님도 뭔가 수상하고(smell a rat) 두 사람도 뭔가 수상하다.
아들 이삭은 순순히 제단 위에 눕는다. 이제 아버지의 칼이 자신의 몸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각을 떠서 불태울 것이다. 각을 뜬다는 것은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는 의미다.
뜨다(cut)로 번역된 נתח [nâthach ; 나타크]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 관절을 분리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각(piece)으로 번역된 נתח [nêthach ; 네타크]는 `조각 특히 고기의 토막'을 뜻한다.
이삭이 이 과정을 모를리 없다. 사람에게 이 얼마나 잔인한 대우(treat)인가? 그러나 이삭은 평온히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자포자기(self-abandonment)는 아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내어드림' 이었다고 본다. 분명 기쁘지 않은 요구이고 삶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는 일이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조용히 내어드린다. 우리는 몇 줄의 글로 읽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지만 정작 나의 현실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구칠 상황이다.
아브라함이 칼을 빼어 들자 하나님께서 큰 음성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의 행위를 중단시키신다.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충성됨을 인정해 주신다.
(창세기 22:11-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아브라함을 칭찬하시면서 이삭의 믿음도 칭찬하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이삭도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십일조가 아까워 지폐를 봉투에 넣었다 뺐다 하는데 이삭은 목숨까지 흔쾌히 내어 드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눈에 보여지는 숫양 한 마리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 미리 준비하신 제물이다. '여호와 이레(Jehovah-Jireh)'의 어원(word root)이 되는 배경이다. 요즘 말로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창세기 22:13-14)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우리의 삶도 이삭과 같다. 홀로 버려진 것 같고 홀로 고군분투(fight alone) 하는 것 같지만 고단한 현실 저 편에는 나를 위한 여호와이레가 기다리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 번제 사건을 통해 삶은 여호와 이레를 경험해 가는 과정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힘들어도 가야 한다. 원하지 않았어도 가야 한다. 모리아 산에 가면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리아 산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이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사명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