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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죽으면 죽으리라

문학n천국 2023. 10. 14. 10:54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15] 죽으면 죽으리라 (If I perish, I perish)

1991년 최고 시청률 75%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주제곡으로 크게 사랑을 받은 노래가 있다. 김국환의 <타타타>이다. 대발이 엄마(김혜자 扮)와 아버지(이순재 扮)가 안방에서 카셋트 테잎으로 즐겨 듣던 노래다. 아줌마들의 인생곡이 된 노래다. 무명이었던 김국환씨는 방송 2회만에 섭외 1순위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거지
그런거지 음음음 어허허
산다는 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 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게 덤이잖소'

타타타(tathātā)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의 것’ 을 뜻한다. 가수 김국환이 부른 이 노래는 작사가 양인자씨가 인도(India)를 여행하며 지은 가사에 작곡가 남편 김희갑씨가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 노랫말처럼 인생은 남는 장사일까? 모든 사람은 남는 장사를 하고 가는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이 곡을 쓰신 분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틀렸다'와 '다르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우리가 인생을 하루 하루 소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점점 길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오늘은 분명 기회이지만 어제는 상실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잃어버린 기회이다.

이 노래는 세상 걱정도 인생의 덤(free gift)이라고 미화한다(beautify).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살라'고 한다. 물론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매우 큰 걱정때문에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어이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짧은 우리네 인생을 흐느적거리며 살 수는 없다. 힘을 다해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덤이란 것도 주어진다고 본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은 37년간 세상을 떠돌며 세태를 풍자하는 시(詩)를 지었다. 김병연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홍경래 난(洪景來 亂 1811년)에 가담했다가 역적으로 처단되고 가문이 폐족(廢族)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역적의 후손으로 블랙리스트(blacklist)에 이름이 올라 벼슬길이 막히고 박스(box) 안에 갇힌 인생이 되자 그의 트레이드 마크(trademark)가 된 대나무 삿갓과 큰 지팡이 하나만을 들고 세상을 방랑했던 것이다.

다음은 김삿갓의 <스스로 탄식하다> 는 제목의 시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이렇게 김삿갓은 37년을 방랑하며 떠돌았다. 술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시의 주제는 탄식이다. 물론 그의 삶을 이해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탄식만 할 수는 없다. 어찌하든 능동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인생의 기회는 단 한번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생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삶을 가치없는 것으로 보는 염세주의자(pessimist)가 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그곳에서 지어 부른 노래가 있다. 일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이다.

(시편 137:1-4)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멸망하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그리고 바벨론은 신흥강국 바사제국(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다. 86년 만에 곧 백 년도 안되어 강대국 바벨론은 멸망한 것이다. 바사왕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 백성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세 차례에 걸쳐 팔레스타인 곧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유대 땅에 귀환환 백성은 최소 51,000명 이상이었다.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것은 3차 때 귀환한 백성들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차에 49,897명이 귀환했고, 2차에 1,754명이 귀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대인은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정착했다. 우리는 이들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의 수가 100만 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6%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사(페르시아)왕 다리오 1세의 아들인 아하수에로 1세는 동쪽 인도로부터 서쪽 에티오피아까지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그는 전국을 127도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고 삼년 후 도성인 수산성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 칠일 째 아하수에로 왕은 왕비 와스디를 그 잔치에 초청한다. 하지만 왕비는 이유도 없이 거절하고 만다.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이 일로 화가 난 왕은 와스디를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킨다. 그리고 새 왕후를 구하는 칙령을 내린다.

(에스더 1:11-12)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와스디가 폐위되고 다음 왕후로 발탁된 사람이 유대인 에스더이다. 에스더는 일찍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사촌 오빠되는 모르드개가 데려다가 딸처럼 키웠다. 모르드개는 왕궁 문지기였다. 에스더는 왕비를 뽑는 경합에 나갔다. 그리고 에스더는 경쟁을 뚫고 왕후로 간택되었지만 스스로 유대인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새 왕비 에스더를 페르시아인으로 알았을 것이다.

(에스더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바사제국의 관리 가운데 하만(Hama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왕 다음 가는 권세가 있는 총리였다. 이 사람은 유대인을 혐오했다. 그 이유는 왕궁 문을 지키는 유대인 모르드개가 매번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당연히 상사에게 예(禮)를 갖춰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도 모르드개는 하만이 과거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였던 아말렉 족속 출신이라서 그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일종의 영적인 자존심 같은 것이었으리라.

하만은 바사제국 안에 있는 유대인 전체를 죽이기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왕에게 유대민족의 위험성을 알린다. 무익한 민족이라며 설득한다. 자기가 모든 비용을 낼테니 날짜를 정해 유대인을 한 날에 죽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한다. 물론 왕은 하만을 의심하지 않고 어인을 찍어 허락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유대인에게도 알려지고 만다. 유대인들은 뜻하지 않게 죽을 날이 정해지고 말았다. 이런 것이 권력의 폭력이다.

(에스더 3:8-9)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에스더 3: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모르드개는 하만의 계획을 에스더 왕비에게 알린다. 하지만 공표된 왕의 칙령은 바꿀 수 없었다. 에스더는 왕의 칙령은 바꿀 수 없음을 모르드개에게 상기시킨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마음을 움직일 천재적인 논리를 펼친다. 바로 '네가 왕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결국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선포하고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한 금식을 명령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왕의 호출이 없으면 아무리 왕비라 해도 왕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규례 곧 궁중법도였다. 에스더는 이미 삼십 일 째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에스더 4: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에스더 4:15-16)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는 삼일 금식 후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간다. 이제 에스더의 목숨은 왕의 표정에 달려 있다. 왕이 미간을 찌푸리면 재앙이 임할 징조이고 만약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은 에스더를 보자마자 만면(滿面)에 미소를 띤다. 오히려 왕비를 걱정하며 금 규를 그녀에게 내민다. 에스더는 살았다. 피 말리는 긴장이 끝이 났다.

(에스더 5:2-3)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왕은 에스더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금식 삼일을 했으니 얼굴이 까칠했을텐데 사랑스러워 보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왕의 눈에 '콩깍지를 씌운(be blinded by love)' 것이 분명하다. 왕은 에스더에게 소원을 묻는다. 그리고 에스더는 하만의 악한 계획을 고발하고 유대민족을 구원해 주시길 호소한다. 왕은 에스더에게 왕후가 주도적으로 유대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준다.

(에스더 7: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왕의 허락을 받은 에스더는 유대인들에게 명령해 하만의 악한 모의에 동참했던 사람 칠만 육천 명 가량을 죽인다. 12월 13~14일에 왕의 명령대로 원수를 멸하고 승리한 것이다. 결국 에스더의 승리이고 유대인의 승리였다. 유대인들은 이 승리를 기념해 유대인의 민족 절기인 부림절(Day of Purim)을 지낸다.

(에스더 9:12,15,16)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에스더 9:17-18)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어쩌면 우리의 삶은 늘 위기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항상 위태로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늘 잔치(feast)이기를 원하신다. 유대인들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잔치를 즐기기를 기뻐하신다. 그런고로 잔치같은, 축제같은 삶을 위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하겠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은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