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17] 우리는 열심당이 아니다
2015년 개봉한 누적 관객수 1,270 만명의 한국영화 역대 순위 8위인 <암살(暗殺)>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나는 영화관은 물론 TV 영화 채널에서도 몇 번 시청했다. 전지현 이정재 조승우 이경영 하정우 오달수 등 미친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캐스팅 되었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 단체였던 의열단(義烈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19년 3.1 운동이 거족적(擧族的)으로 전개된 이후 애국지사들은 국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를 강력한 무력으로 응징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운동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9년 11월 9일 밤 길림성, 한 중국인 농민의 집에서 조선 청년 13명이 모였다. 눈이 내리고 강추위가 매서운데도 20대 청년들은 밤을 새워 토론했다. 이튿날(10일) 새벽에 이르러 이들은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 는 의미에서 단체의 이름을 ‘의열단’으로 정했다. 그들은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시켜 계급을 타파해 토지 소유를 평등하게 한다' 는 목표를 세우고 김원봉을 맏형 격인 ‘의백’으로 선임했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의열단은 창단 이후 해체되기까지 10년 동안 일본경찰서 폭파, 일본군 고위 장교 저격, 수탈기관 폭파, 일왕 거주지 폭탄 투척, 밀정과 변절자 암살 등 크고 작은 투쟁을 34번 행했다. 단원들은 일본 군경과 밀정들에게 쫓기고, 수시로 생사의 요단강을 넘나들었지만 한 사람도 변절하거나 투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청춘을 애국애족에 바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헌신은 훗날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남긴 명언 가운데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서산대사(1520~1604)의 선시(禪詩) ‘답설야(踏雪野)’의 글이었다. 김구 선생이 자주 인용해 백범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좋은 발자국을 남기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한 과제이다. 의열단은 민족의 독립을 소망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무력으로나마 완성시켜 나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간 길을 다음 세대들은 배워가고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도 조선 의열단 같은 단체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일어선 구국 단체이다. 곧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운 조직이다. 성경은 그들을 이름하여 열심당(熱心黨, Zealot, 젤롯당)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B.C. 6년 경부터 A.D.73년까지 약 80 여년간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도 열심당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룟유다와 젤롯인(가나안인)인 시몬이다(눅6:15). 젤롯이 열심당의 명칭이니 젤롯인 시몬은 모두가 인정하는 열심당원이었던 것 같다.
초대교회의 문서에 의하면 열심당과 관계있는 인물이 더 있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다대오’이다.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영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라고 질문함으로써 열심당의 급진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물론 가룟유다와 몇 제자가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은 추측일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열심당원들은 당시 예수님의 높은 인지도(認知度)와 능력을 보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할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이 로마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천국복음 증거에만 중점을 두자 열심당원들은 실망을 했고, 급기야 가룟유다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얘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총독은 명절을 맞아 바라바와 예수 중 한 사람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바라바 또한 열심당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로마제국 고위층을 암살하고 재물을 탈취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의열단의 활동과 유사하다. 당시 군중들은 예수님과 바라바(Barabbas) 중 바라바를 선택한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기대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누가복음 23:18-19)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누가복음 23: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가룟유다(Judas Iscariot) 또한 당시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추종했다가 실망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배신을 한 것 같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죽임은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사형 당할 죄가 예수님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게 되자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마태복음 27:3-5)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한 것 같다. 그는 정치가 세상을 바꿀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오늘날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에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과거 1933년~1945년까지 12년 동안 히틀러에 의해 유대인 600 만 명을 포함해 1,100 만명이 학살되었다. 이 학살사건을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라 한다. 지금도 정치는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불행으로 밀어넣고 있다. 지난 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대통령 푸틴 아저씨처럼 말이다.
열두 제자들은 훌륭한 면도 있었지만 부족한 면도 많이 노출했다고 본다. 기적의 현장에, 군중들의 환호 속에 있을 때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 했다가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은 그들의 연약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영화 속에서 조폭들이 의리를 지키는 장면보다 훨씬 더 가벼운 장면을 제자들은 보여주었다. 의리라고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의 의리는 깃털보다 더 가벼웠다. 주님을 버리고 나 하나 살겠다고 도망치는 모습은 간접 목격자인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장면이다.
(마태복음 21:6-9)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수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며 세 번 부인했다. 신앙보다 자기 목숨이 우선이었다. 베드로가 이 수준이면 다른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의 수준은 어떠할까? 난 아닌 척 폼 잡아도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우리의 부활도 믿지 못하는 수준에서는 다 똑같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부활신앙이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6:70-74)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영국 작가 C.S 루이스(C.S. Lewis)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만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동안 주님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고 말했다. 그렇다. 주님 안에 두려움이 없다. 세상을 보면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킹메이커(kingmaker)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왕으로 예수님을 추대하려 한 것 같다. 큰 착각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킹메이커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종(servant)일 뿐이다. 그렇다고 노예(slave)는 아니다. 하인과 노예는 다르다. 이 생각이 바르게 정리되지 않으면 제자들처럼 주님보다 앞서가게 된다. 그럼 실패하고 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의열단원도 아니고 열심당원도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전투병으로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신게 아니다. 우리를 영원한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 길은 십자가 위에 건설되어 있다. 진부한(cliché) 얘기일 수도 있지만 '예수만이,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한국 교계에도 의열단이나 열심당을 모방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예수 이름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 같다. 넓은 광장에 자주 모이려 한다. 그분들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열심당처럼 자칫 왜곡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