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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편견을 갖지 말라

문학n천국 2023. 11. 4. 02:54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18] 편견(偏見)을 갖지 말라

미국 UCLA 대학교 의과대학의 한 교수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사례를 들어 질문을 던졌다( UCLA :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 아이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잘못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합니다" 그러자 교수가 점쟎게 대답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음악의 성인 곧 악성(樂聖) 베토벤(Beethoven,1770~1827)은 바로 그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었지만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살면서 많은 곡을 작곡했다. 물론 베토벤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그 환경에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했다. 이것을 보며 무릇 우리 인간의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될 수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교수는 말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들었다. 물론 곡(曲) 길이가 30분이 넘으니 중간에 멈췄다. '빠바바밤~빠바바밤~' 누구나 아는 첫 소절이다. 얼마나 장엄한 외침인가? 이 곡은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후 작곡했다고 한다. 공원의 새 소리를 모티브(motive)로 이 첫 악장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렇다. 좋고 나쁜 사건들이 우리 삶에 운명이란 이름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매번 사건마다 운명이라든지 비극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우습긴 하다. 내 개인적으로 "인생은 살아내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으로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클래식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과학도 기술도 아이디어 산업이라고 믿는다. 심지어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유명 작가들의 글쓰기 강연을 들어보면 "무조건 많이 읽어라, 무조건 써라" 가 핵심이다. 글쓰기엔 왕도(royal road)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한 이 사람의 생각은 글쓰기는 '아이디어(idea)와 문장력'이 결정한다고 본다. 난 그래서 교회음악 뿐만아니라 이런저런 음악을 많이 듣는다. 아이디어가 마르지 않도록 나름 애쓰는 것이다.

의대생들이 아이(베토벤)를 유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편견(prejudice)이다. 그 편견들이 오늘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베토벤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 위대한 베토벤도 편견의 희생양(scapegoat)이 될 뻔 했던 것이다.

성경에 사람들의 편견의 희생양이 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땅 수가(sychar) 마을에 살고 있던 무명의 여인이다. 이 여인은 정조(貞操)가 없고 난잡한 여인으로 오해받고 있다. 목사님들의 설교에 단골로 등장하여 불륜녀의 대명사가 된 사람이다. 그 여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다.

(요한복음 4:16-19)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인의 신상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본문만 보고 이 여자를 창녀 혹은 난잡한 여자로 낙인 찍고 말았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나는 이 여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씻어 주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성경은 단 한 구절도 우리처럼 평가하고 있지 않다. 그저 예수님을 만난 여인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남편이 다섯 있었고, 지금 사는 사람은 그냥 동거인이니 불륜녀가 맞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인을 죄인라고 말하지 않으셨고 성경도 여인을 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우리의 생각이 너무 상식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남자가 많았으니 창녀였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시대부터 예수님 시대에도 계대결혼이라는 혼인제도가 있었다. 율법이 규정한 합법적인 결혼법이다.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은 가족 중의 한 형제(장자)가 대(代)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다른 형제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가문과 기업을 잇게 해주는 법으로 일명 형사취수(兄死娶嫂) 법이라고 한다.

(신명기 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22:24-30)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신약성경의 예시에 따르면 칠 형제가 한 여자를 취했다고 말씀한다. 모두 일찍 자식없이 죽어 여인은 신명기 규례에 따라 일곱 형제와 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어느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모세의 법을 지킨 여인을 어찌 창녀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수가 마을 여인을 향해 예수님이 죄를 지적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녀를 모세의 법을 지킨 여인으로 평가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이 여인에 대한 평가는 180° 바뀔 수 있다.

나는 이 여인이 창녀가 아니라 편견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반론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이 그녀를 창녀 혹은 불륜녀로 지목하지 않는 한 그 불명예에서 자유롭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여인은 마을 사람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창녀나 불륜녀였다면 그 마을에서 추방당했거나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라며 비꼬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인은 마을 주민들과의 교제나 소통에 장애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또 하나 수가성 여인이 창녀로 오해받는 중요한 원인은 그녀가 제 육시 곧 오늘날의 정오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위때문에 낮잠을 자는 시간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두가 낮잠을 자는 시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퍼가기 위해 왔다는 것인데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에 왔다는 기록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정오에 우물 물을 길어가기 위해 왔던지, 오후 세 시에 왔던지 그것은 오롯이 그녀의 자유로운 의사결정(意思決定)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너무 억측(臆測, surmise)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간섭일 뿐이다.

(요한복음 4:6-7)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임이 알려지자 나다나엘은 나사렛 같은 땅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없다며 예수님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메시야는 유대 땅에서 나와야 한다는 논리다.  이또한 엄청난 편견이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1:45-50)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편견도 갖지 않으신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편견을 갖고 보신다면 우리는 모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셨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트라이즈 에드워즈의 편견에 대한 명언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다. 편견은 진실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최악의 마귀이다"

편견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상대를 자유케 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수가 마을 여인은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녀는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간 평범한 시민이었고, 예수님을 만난 후 전도자로서 살아간 그리스도인이었다. "무명의 수가 마을 여인이여, 이제 그대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