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26] 인간의 존엄(尊厳)을 지켜내라
힌두교(Hinduism)는 인간의 인생을 4단계로 설명한다. 태어나서 25세까지를 학습기(學習期) 혹은 향수기라 한다. 학교를 다니며 배우는 단계이다. 25세 부터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혹은 가정기라고 한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며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50세 이후 75세까지를 임서기(林棲期) 혹은 임적기라고 하는데 숲 속에 들어가서 혼자 사는 단계이다. 집을 떠나 숲 속에 움막을 짓고 혼자 사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삶을 정리하는 기간이다.
마지막으로 75세가 넘으면 움막에서 나와 유랑기(流浪期)에 접어든다. 유랑기는 거지로 구걸하면서 길바닥을 돌아다니는 기간이다. 또한 그들은 성지(聖地)라고 일컫는 갠지스 강(ganges river)에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리고 죽으면 화장되어 그 강물에 뿌려지는 것으로 현세(現世)의 삶을 마감한다. 이것이 힌두교인이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다.
길바닥에 나가 구걸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하다니 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absurd) 일인가? 이 얼마나 그릇된 삶의 해석인가?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결국 구걸로 인생을 마감할 것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생 허무주의(虛無主義)가 아닐까? 추측하건대 힌두교를 신봉하는 나라들이 유독 가난한 것은 이런 잘못된 인생 지침(precept)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대 힌두교 국가인 인도(India)와 파키스탄(Pakistan)의 2021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각각 1,920 달러(한화 약 250만원)와 1,270 달러(한화 약 170만원)이었다. 참고로 2023년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독일 5만 3947달러, 프랑스 4만 7988달러, 영국 4만 6066달러이며, 한국은 4만 6257달러이다.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부유함에 비해 힌두교 국가들은 매우 빈곤한 수준이다. 정말 힌두교가 추구하는 거지 수준의(?) 경제 지표들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는 힌두교가 수백, 수천의 신을 가진 다신교(多神敎)라면, 이슬람교는 알라(Allah)만을 믿는 일신교(一神敎)이다. 반면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할까?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것일까? 누구나 한번쯤 맞닥뜨린 질문일 것이다. 만약 성공이 곧 행복이라면 용산이나 여의도 국회에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농촌에서 땅을 일구거나 과실수를 재배하거나 고깃배를 타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내가 아는 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행복은 자기 만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미 성공을 경험해 가고 있다고 믿는다.
천재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 박사는 '성공한 사람보다는 가치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그렇다.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존재를 빛나게 한다고 믿는다. 단 하루를 살아도 가치있는 삶이 되길 힘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치있는 일에 인생을 올인(all in)하면 좋겠다.
성경에 힌두교인들처럼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던 사람이 있다. 곧 무덤가에 살던 사람이다. 이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사는 것은 귀신에 들렸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두 사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포학하며 쇠사슬도 끊을만큼 강하며 세상에서 떠나 격리되어 살아가고 있다.
(마태복음 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마가복음 5:3-5)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누가복음 8: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 사람은 행복했을까? 무덤가에서 옷도 걸치지 않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삶에 그는 만족했을까? 아니면 정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귀신에 붙잡혀서 저항도 못하고 있었을까? 오랜 세월 무덤가에서 살았지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돕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거라사 지역은 이방인의 땅이다. 만약 유대인 공동체 안에 살고 있었다면 영적으로 도움을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땅에 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가신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그 사람을 찾아가신다. 유명한 종교지도자가 타종교권에 있는 한 사람을 찾아간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뜻밖에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너무 험악하여 모든 사람들이 기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방문하신 것이다. 그는 엎드렸다. 아무리 귀신들려 포악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는 거꾸러질 수 밖에 없었다.
(누가복음 8: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이 사람이 엎드린 것은 곧 귀신이 엎드린 것이다. 아무리 귀신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귀신은 예수님께 자기를 내버려 두고 떠나시기를 간청한다. 귀신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서 쫓겨나 지옥으로 가게 될 줄로 안 것이다. 그래서 돼지떼에게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다.
(누가복음 8:30-32)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마태복음 8:30-32)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에게서 나온 귀신들은 주변에 있던 돼지떼 이천 여 마리에게로 들어간다. 이들은 숫자로 보아 군대 귀신이다. 돼지떼는 갑자기 귀신의 영들이 몸 속으로 파고 들어오자 그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바다로 뛰어든다. 그리고 모두 익사하고 만다. 돼지떼가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물 속으로 뛰어든 것으로 미루어 귀신들린 사람이 벌거벗고 다닌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누드를 좋아해서 벗고 다닌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의 축사 사역을 훙내낸 이들이 있었다. 축사는 귀신을 쫓는 능력이다. 이런 축사 능력이 없음에도 귀신에게 대들었던 스게와의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히려 귀신들의 공격을 받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고 말았다. 이들과 귀신들과의 싸움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았다. 이들은 귀신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행전 19:13-16)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개인적으로 나는 글 쓰는 목사이자, 축사 사역자이다. 이십 여년 밤낮 구분없이 산에서 부르짖는 중 주님이 주신 은혜이다. 축사 사역을 하면서 얻게 된 팁은 축사자가 귀신들린 사람 앞에서 먼저 겁을 먹거나 두려움을 갖게 되면 그 축사는 물 건너 간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미 악한 영에게 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축사를 계속하려면 기도를 쉬면 안된다. 기도를 계속해야 같은 능력을 매번 나타낼 수 있고 귀신 앞에서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시쳇말(時體말), 곧 요즘 말로 귀신들린 사람이 아무리 지랄염병을 떨어도, 아니 조금 고급스럽게 표현해 귀신들린 사람이 온갖 발작을 일으켜도 담대해야 한다.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겁 먹은 목소리로 축사하는 건 지양해야(sublate) 한다. 최소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귀신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겁 먹지 말아야 한다.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귀신이 떠난 것에 놀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치유되어 인간의 존엄(尊厳)을 회복한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귀신에게 빼앗겼던 삶이 온전히 회복되어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귀신이 떠나자 온전한 모습이 되었다.
(마가복음 5: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마가복음 5:18-20)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우리의 신앙이 복 받기만을 위한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 마귀에게 붙잡혀 가치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을 마귀의 굴레에서 구해내 거룩한 성도로서, 축복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도록 돕는 데 있다. 또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주목하는 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