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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컬러 배스 효과

문학n천국 2024. 1. 19. 14:00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28] 컬러 배스 효과 (color bath effect) 
       ( 부제 : ' 내 눈엔 너만 보여 ' )

오늘은 오렌지 컬러와 함께 하는 날로 정하고 그렇게 마음 먹으면 그날은 오렌지 컬러로 프린팅(printing)된 사물들이 눈에 잘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한 가지 색(色)에 집중하면 유독 그 색(色)을 가진 사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을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라고 한다.

또한 무언가를 마음 속에 품고서 주위를 둘러보면 유독 그것만 눈에 잘 띄는 것을 말한다. 조금 지저분한 예(例)를 들면 우리 조상들은 '개 눈엔 똥만 보인다' 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했다. 이처럼 '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것'을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라 한다. 우리네 가족이 운동장처럼 넓은 곳에 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 있어도 금방 찾아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36년 전, 곧 1988년 군(軍)에 입대했는데 6주 신병교육을 마치고 퇴소식(退所式)에서 부모님과 내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총검술 시범, 태권도 시범, 벽돌 격파 시범을 했다. 물론 좋아서 한  것은 아니다. 또한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 밤낮으로 죽도록 연습해서 보여준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행위예술)였다. 특히 벽돌 격파는 수백 명이 동시에 기합 소리와 함께 벽돌을 깨는데, 멋있어 보이지만 이건 사기(fraud, 詐欺)였다.

훈련병들이 깨는 벽돌은 며칠 동안 소금물에 담궜다가 꺼내서 말린 후 각자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나온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 일사분란(一絲不亂)하게 내리쳐 격파하면 된다. 이미 벽돌은 푸석푸석해서(crumbly) 초등학생도 깰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수 백 명 가운데 십 여명은 소금물에 담그지 않은 벽돌을 준다. 한번에 다 성공하면 왠지 사기처럼 보여서 몇 명에게는 진짜 물 한방울 안 들어간 참(?) 벽돌을 준다. 그러나 받는 사람도, 나눠주는 사람도 어떤 것이 진짜 가짜인지를 구분 못한다.

벽돌이 한번에 깨지지 않으면 훈련병들은 크게 당황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망신인가?'를 생각할즈음 사회자가 모두를 땅바닥에 앉게 하고 벽돌이 깨지지 않은 사람만 일어서게 한다. 십 여명 쯤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벽돌을 격파해 보라며 인심쓰듯 다시 기회를 준다.

창피함을 넘어 이젠 쪽 팔려서 얼굴이 홍당무가 된 훈련병들은 정말 죽기 살기로 벽돌을 내려친다. 그러면 벽돌은 거뜬히 깨진다. 박수 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진다. 그런데 사실 이 열 명은 피해자들이다. 소금물 한 방울 안 먹은 쇳덩이 같은 벽돌을 주었으니 못 깨는 게 당연한거다. 내가 그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날 이후 며칠동안 벽돌을 내리쳤던 내 오른손은 살찐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벽돌을 깬 후 연병장 한 쪽에 마련된 귀빈석을 바라보았다. 거의 천 여명 쯤 되어 보이는 군중들 속에서 단 몇 초만에 우리 부모님을 찾아냈다. 내 부모는 아무리 군중 속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또한 컬러 배스 효과이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가을 운동회에 가보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무리지어 섞여 있어도 내 아이들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이 또한 같은 이치다. 그렇다.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의 핵심은 '관심과 집중'이다.

시골 개는 지난 밤 누군가 배설해 놓았을 똥을 찾아 아침부터 들판을 헤맨다. 모든 후각을 사용해 누군가 만들어 놓았을 케잌 모양의 응가(poo-poo)를 추적한다. 그리고 이내 찾아내서 먹는다. 강아지가 똥을 먹는 것은 강아지들의 특징인 식분증(食糞症)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아지는 대부분 다른 개의 똥보다는 주로 자기 똥을 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개들이 똥을 찾아 다니는 것도 컬러 배스 효과이다.

똑같은 '+' 라는 기호를 바라보게 될 경우에 수학자는 덧셈 부호로 보고, 목사는 십자가로, 교통경찰은 사거리로,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으로 보고, 간호사는 적십자로 보고, 약사는 녹십자를 연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 또한 컬러 배스 효과이다.

결론적으로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는 자기 위주로 보는 것이다. 남의 안목은 중요하지 않고 내 필요를 쫓아가는 것이 컬러 배스 효과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룟유다가 있다. 제자 공동체의 총무이다. 어느 모임이든 총무는 나름 똑똑하고 인정받는 사람에게 맡긴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아마 짐작컨대 이십 여명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5:40-41)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가룟유다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맡은 돈 주머니를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로 하면 형법상 횡령죄이다. 공유재산을 자신의 목적대로 유용한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 형법 조항에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가룟유다가 돈을 훔쳐갔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제자들 중 누구도 가룟유다가 관리하는 돈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를 신임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모르실리 없다는걸 그는 깨닫지 못했을까? 아마 예수님은 공동체를 위협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묵인하고 계셨을 것이다. 스스로 뉘우치고 상황을 정리하기를 기다리셨을 것이다. 요즘 말로 공금 문제로 제자 중 하나를 탄핵한다면 제자공동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4-6)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유다는 똑똑했을지언정 공동체를 위한 마음은 부족했던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게 되자 그는 예수님을 버리기로 결정한다. 그가 생각했던 메시야는 죽음을 뛰어넘을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영웅, 곧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B.C.356-323)같은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 왕은 알렉산더가 스무살 되던 해 근위병에게 암살당한다. 그리하여 알렉산더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알렉산더는 좋은 스승에게 지도를 받는데 그 스승이 바로 그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는 명언을 남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그리스에서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 정복하고 대제국을 이룬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33세에 죽고 만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박테리아균에 감염돼 사망했다고도 하고, 독초 와인을 마시고 사망했다고도 한다.

가룟유다가 경험한 예수님은 알렉산더 같은 영웅이 아니었다. 결국 가룟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버리고 만다.

(마태복음 26:14-16)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런 가룟유다에 대해 예수님은 마음 아파하신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자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룟유다는 자살한다. 그리고 가룟유다는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허락된 명예의 전당(名譽의 殿堂)에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가룟유다를 대신해 사도의 자격을 얻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자는 제자 맛디아(Mathias)이다.

(마태복음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사도행전 1:24-26)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사울왕과 다윗이 있다. 그런데 사울왕이 다윗을 추격했다. 백성들이 자신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사울의 관심은 다윗 제거에 맞춰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윗에게로 시선을 빼앗기면서부터 사울왕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사울왕이 '컬러 배스'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사울은 온통 다윗 제거에만 집중했다. 이제 그의 눈엔 다윗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울왕의 삶은 다윗을 쫓다가 끝났다 해도 억지는 아니다.

(사무엘상 18:7-9)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울왕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욕심만 쫓는 삶은 모두를 불행에 빠뜨릴 수도 있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 것만 들으면 갓난 아기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왕을 버리셨다. 사울왕은 하나님에 의해 탄핵 당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사무엘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사무엘상 31:4) '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우리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장수가 있고, 평화가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다. 우리 눈엔 예수만 보여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