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30] 빠꾸(back) 인생이 되지 말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의 펜을 들어 글을 쓰라(If you want to change the world, pick up your pen and write)'고 말했다. 루터는 전투적으로 글쓰기에 매진했는데 며칠씩 식사를 거르고 글을 쓰는 것은 다반사(茶飯事)였고, 30년간 보름마다 책 한 권이나 팸플릿(Pamphlet)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루터는 42세였던 1525년 6월 13일에 천주교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와 결혼하게 되는데 루터보다 무려 16살이나 어렸다. 카타리나는 길다란 얼굴에 툭 튀어나온 이마, 볼품없이 길쭉한 코,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 아주 고집스럽게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은 천주교 수도사와 수녀와의 결혼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사실 루터의 결혼은 당시 매우 타락했던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교황부터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타락했고 부패했다. 교황이 사생아(私生兒) 곧 혼외자(婚外子) 자녀들을 공식 석상에 데리고 나타날 만큼 윤리적으로 무감각하던 시대였다. 특히 214대 교황 알렉산드르 6세(Alexander VI : 1492~1503)는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는 탐욕의 끝판왕이었다. 그는 뇌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의 자리에 올랐고, 사생활이 난잡하여 16명이나 되는 사생아와 수많은 정부들을 두었다. 알렉산드르 6세와 사생아 자녀들은 각각 부녀와 남매끼리 근친상간을 둘러싼 여러 가지 추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개판(shitshow), 곧 강아지판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교황에게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함으로써 타락한 카톨릭을 개혁하고자 했다.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모난 돌이 일으킨 반란이 아닌 합리적인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이었고, 오늘날의 개신교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개혁교회 곧 개신교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도 온전하지 않았는데 교인들이 술과 담배는 기본이었고 노름(gambling)을 즐기는 교인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1920년대 한국교회 찬송가에는 <금주가(禁酒歌)>라는 곡이 있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권고의 내용이었다. 이 곡(曲)을 교회에서 부르게 된 이유는 당시의 퇴폐적인 문화 때문이다. 일본은 1910. 8.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倂合條約)을 통해 우리나라를 통치하면서 일본의 퇴폐문화를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이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술, 아편(鴉片), 화투, 공창(公娼, 성매매)등을 들여왔다. 또한 우리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우리 전통 옷도 입지 못하게 했다.
다음은 <금주가(禁酒歌)>의 가사이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두렵다.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푼 안 쓰려네
3.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이 금주가는 1923년에 청년찬송가에, 1931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만든 신정찬송가 230장에, 1949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만든 합동찬송가 486장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1963년 개편찬송가에서 누락된 후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통치하면서 역사를 퇴행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 같다. 그 방법론으로 타락한 문화를 이 땅에 심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불온(不穩)한 시도를 끊고 민족의 순결을 지켜내려 애쓴 것이 바로 한국교회였다. 한국교회는 소금의 역할을 자처했다.
성경에 탕자(蕩子)의 이야기가 있다. 탕자는 어느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무 문제없어 보이던 이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께 유산(遺産)을 청구한다. 아버지가 멀쩡하게 생존해 계시는데 말이다. 유산이란게 본래 물려주는 사람의 주관이 중요한데 둘째 아들은 특별한 계획도 없이 유산을 요청했다. 세상 경험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또한 아버지가 위중한 상황이 아님에도 유산을 청구한 것으로 미루어 착한 아들은 아닌 것 같다.
(누가복음 15:11-1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들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선뜻(?) 유산을 나눠준다. 작은 아들은 먼 땅으로 떠난다. 먼 땅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이집트, 터키, 그리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당시 이 나라들은 문명이 상당히 발달했었다. 작은 아들은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결국에는 돼지치는 자로 전락한다. 그는 애초부터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리고 성경은 곧이어(soon after) 작은 아들의 철저한 실패를 공개한다.
(누가복음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작은 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인해 유산을 낭비했다. 작은 아들의 방탕함은 고향에 있던 아버지와 형에게도 전해진다. 훗날 빈털터리(broke)로 집에 돌아왔을 때 형이 동생을 비난하는 말 속에서 아버지와 형은 이런 결말을 예상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작은 아들은 창녀에게 혼을 빼앗긴 듯하다.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맡기고 말았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현실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무일푼(penniless)이 되어 있었다.
(누가복음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작은 아들의 처지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돈이 없으니 창녀에게서 버림받았다. 이제 갈 곳이 없다. 어디서도 환영해 주지 않는다. 결국 그가 몸을 의탁한 곳은 돼지농장이다. 그만큼 작은 아들은 절박해졌다. 살아 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아들은 쥐엄열매 곧 돼지 사료로 끼니를 해결했다.
(누가복음 15:15-16)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작은 아들이 고향을 떠나 실패를 경험한 후 얼마만에 다시 아버지 집에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처럼 항공기나 유람선이 없던 시절이니 돌아오는 길도 간단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작은 아들은 그 세월동안 발전하지 못했고 오히려 뒤로 가는 인생, 곧 빠꾸(Back의 경상도식 표현) 인생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인생에는 도돌이표(repeat mark)가 없고, 후진을 해선 안된다' 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작은 아들은 앞으로 달리지 못했고 인생을 뒤로 달렸다. 빠꾸 인생이었다. 이것은 오롯이 그의 선택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happy ending)이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마을 입구에 아들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placard)는 걸리지 않았지만 큰 마찰없이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졌다. 책벌(責罰) 대신 오히려 잔치가 벌어졌다.
(누가복음 15: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직진(直進)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곁에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원하지 않아도 후진(後進) 인생이 되고 만다. 비참함에 스스로 괴로워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행군할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이 동행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고집스런 백성들은 그 땅을 염탐하고자 한다. 중요한 결정을 자기들이 하려 한다. 결국 그 땅을 염탐한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예쓰(yes)' 가 아닌 '글쎄요(let me see)' 라는 태도를 보인다.
(신명기 1:22, 26)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철회하자 그들의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를 빙글빙글 돌게 하신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한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백성들의 어린 자녀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모든 백성들은 죽어서 사막 모래에 묻히게 하신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쳇바퀴 돌듯이 광야를 걸은 것은 전진이 아니다. 후진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죄(罪)는 인생 후진 기어(gear)다. 불신앙은 인생 빠꾸 기어(gear)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비워내면 비워낼수록 우리의 삶은 뒷걸음질이 되고 만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라야 전진할 수 있다. 직진인생이 될 수 있다.
(요한복음 15:5-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