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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삶을 풍성케 한다

문학n천국 2024. 5. 11. 16:17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7) 인문학(人文學)은 삶을 풍성케 한다

1950년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 폴리네시아(Polynesia)의 타히티(Tahiti)는 지상 천국으로 불렸다. 하지만 아이러니(irony)하게도 지상천국이라는 타히티의 자살(自殺) 비울이 매우 높았다.

인류학자 로버트 레비(Robert levy)가 이 문제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곳 원주민들에게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그는 '슬픔'이라는 단어의 부재가 자살률이 높은 이유라고 결론지었다. 타히티에는 '슬픔'을 치유할 ‘슬픔’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언어가 중요한 것이다.

중국의 격언(maxim)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 ( Sharing sadness cuts it in half and sharing happiness makes it double)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슬픔과 기쁨을 언어로 정의(定義)하는 것이다. 어떤 감정을 언어로 정의하는 것이 치유(治癒)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김춘수(1922-2004) 시인의 <꽃>이라는 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존재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일 것이다. 꽃을 꽃으로 불러줘야 아름다운 것이지, 만약 꽃을 청국장으로 부른다면 아름다움은 묻히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 Apostle Paul)이 세계적으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모든 학문 곧 인문학(人文學)에 조예(造詣)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어느 지역에 선교를 가든 언어소통과 지식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 지역을 가든 그 곳 회당에 들어가 강론(講論,homily)했다.

반면에 베드로는 능력의 사도이지만 배움이 없는 어부 출신으로서 그의 사역 범위는 유대 땅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이니 누구든 반박할 수 있다. 인문학을 강조하다보니 치우친 경향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의 지평(地平)을 넓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책이라고 본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가말리엘(Gamaliel)은 당시 유대교 최고의 학자이자 석학(碩學)이었다. 바울은 이 사람의 제자로서 학문을 익힌 것이다. 당시에 최고 엘리트 과정을 수료한 사람이 바울이었던 것이다.

나는 1997년 신학교에 입학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열정으로 산(山)기도에 매진했다. 소나무라도 뽑을 기세로 도전적으로 기도했다. 그렇다고 실제로 내게 뽑혀 생사(生死)를 달리 한 소나무는 없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정말 '앗~ 뜨거~'였다. 보통 사람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기도에 할애(割愛)했다. 그 습관이 계속되어서 지금도 가장 중요한 일과가 '기도'이고, 다음으로 '글쓰기'이다.

내가 글쓰기에 매진하는 것은 바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내 개인을 떠나서 요즘 세계적으로 인문학 열풍 시대이다. 라틴어 격언 중에 “Nomen est omen”이 있다. '이름이 곧 징조'('Name is omen')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동시에 듣는 이의 머릿속에 그 사람이 떠오르게 하는 징조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같은 이치(理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수많은 단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심에도 겨우 몇 단어로만 알고 있으니 신앙이 편협(褊狹)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고로 인문학을 익혀 영육간에 더 풍성해지는 삶을 살아가자. 인문학을 익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증거하자.

다음은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인과 사랑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하나님과 성도의 사랑을 비유한 시(詩)라 할 수 있다. 무미건조한 사랑이 아닌 체감할 수 있는 사랑이 주님과 우리의 사랑인 것이다.

(아가서 2:10-13)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