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38]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12:33-37)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혹평하셨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는 잘못된 삶의 행태를 지적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며, 스스로를 영적인 엘리트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자만에 빠져있던 그들을 비판하셨다.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바리새인들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곱지 않았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요 교육 받은 적이 없는 무식쟁이로 알았는데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유대교를 대적하는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았다. 진리인지 아닌지를 살피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던 것이다.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젖소가 시냇물을 마시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독사가 시냇물을 마시고 있다.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지만 이 그림에는 무서운 결말이 숨어 있다. 젖소는 그 물을 마시고 생명을 살게 하는 우유를 생산해 내지만, 독사는 같은 물을 마시고 생명을 해치는 독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어떤 사람은 영혼을 사랑하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을 삶의 가장 큰 숙제로 여기고 평생에 매진하지만, 그 율법을 남을 정죄하고 죽이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바리새인들은 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반대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했다. 그럼 그들은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12: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열매는 나무의 문제 곧, 본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있어 가장 먼저 다듬어져야 할 부분이 본성의 변화인 것이다. 말씀지식은 쌓여가고 봉사경력도 쌓여가는데 본성의 변화가 없으면 알맹이 없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외적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독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위장한다 해도 결국 본성은 표출되는 것이다.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래서 본성을 새롭게 하는 과제가 시급한 것이다. 날마다 주님의 보혈에 우리의 죄성이 씻김 받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보혈에 씻음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외적이고 일차적인 특징은 언어 곧 말이다. 말의 변화이다.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는 말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말 한다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변화되기 전에는 심중에 있는 말이 여과없이 그대로 표출된다. 하지만 변화되고 은혜를 경험하면 말이 바뀐다.
예수님 십자가 좌우편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 처형을 당할 만큼 행악자들이었다. 그러나 왼편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내뱉지만 오른편의 강도는 생의 마지막 순간임에도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말을 했다.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눅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말이 바뀌어야 한다. 이후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의 말, 소망의 말이다. 본문의 표현처럼 무익한 말은 삼가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