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61] 포도원 품꾼 비유 (마20:1-16)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인력시장을 찾아갔다. 품꾼을 구해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날 필요한 품꾼을 구해 포도원에 들여 보냈다. 이제 주인은 품꾼들에 의해 수확된 것을 정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주인은 제 삼시(오전9시)에도 시내 인력시장에 나아갔다. 그리고 일을 얻지 못해 서성이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또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포도원 주인의 이상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제 육시(정오), 제 구시(오후3시), 제 십일시(오후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가 일을 구하지 못해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포도원에 들여 보냈다.
이제 포도원은 품꾼들로 넘쳐났다. 이렇게 하면 뭐가 남을까 싶을 정도이다. 많은 인건비를 지급하고 나면 수익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은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각 사람에게 약정된 일당은 한 데나리온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일했다.
드디어 제 십이시(오후6시) 일과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 품꾼들은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흡족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일당은 늦게 온 사람부터 지급되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시간만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모두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늦게 온 사람이 받는 보수가 한 데나리온이면 먼저 온 사람들은 훨씬 많이 받을 것이라 상상한 것이다.
다음으로 오후 3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 점심때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 오전 혹은 아침 일찍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었다. 받은 돈을 확인한 품꾼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12시간 혹은 여섯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의 일당이 같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햇빛에 얼굴이 그을려 가며 땀 흘리며 일한 사람들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이럴바엔 차라리 늦게 오겠노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할텐데 싸움판이 되어 갈 분위기였다. 21세기의 상식으로 판단해도 일당 지급 방법은 조금 불공평해 보인다.
주인은 불만을 터뜨린 사람들에게 말한다. 주인에게도 그 사람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1-13)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포도원 주인의 논리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약정된 대로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꾼들은 사람이기에 당연히 서운할 수 있고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늦게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은 주인의 아량에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먼저 온 사람들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돈을 챙겨 재빨리 집으로 뛰어 갔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천국이 이와 같다고 설명하시기 위함이었다. 천국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포도원처럼 채워져 가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누가 감히 포도원 주인이 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포도원 주인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기회를 준 것 뿐이다. 그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본래 인간은 천국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4-16)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은 무엇일까? 천국에 나중에 들어간 사람이 더 인정받는다는 것일까? 당연히 그런 해석은 거부되어야 한다. 먼저 된 자는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부름받은 사람이다. 먼저 선택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나중된 자는 그 다음이다.
누가 좋을까? 먼저 된 자인가? 나중된 자인가? 당연히 주님께 먼저 부름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럼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된 자가 부름받은 목적대로 살지 않고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면 나중 된 자를 통해 부르심의 목적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방황을 일찍 끝낸 사람도, 아주 오래도록 방황한 사람도 천국으로의 부름의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을 부름 받은 목적에 맞게 살아가느냐 이다. 이 목적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칭찬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