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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산책 63.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21:1-11)

문학n천국 2021. 11. 23. 18:17

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63] 주가 쓰시겠다 하라 (21:1-1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다.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 길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해서 가시는 것이다. 이제 십자가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가시는 걸음이기에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벳바게는 '무화과 나무의 집'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으로 부터 약 3km 거리 쯤 되는 마을 이름이다. 예루살렘이 이제 코 앞이다. 그런데 이곳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신다.
(21:1-2)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수님께서는 평상시와 달리 도보가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굳이 나귀를 찾으시는 이유는 성경의 예언 때문이다.
(21:4-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슥9:9)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인생 시간표의 마침표를 찍으시려는 것이다. 마지막 걸음을 말씀의 성취에 두셨다. 이것을 위해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셨던 것이다.

제자 둘이 맞은편 마을에 들어가니 예수님 말씀처럼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고 풀어 끌어오고자 한다. 그때 나귀의 주인이 나타나 이유를 묻자 주님께서 쓰고자 하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나귀 주인은 흔쾌히 나귀를 보내 주었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실 때를 대비해 나귀들을 잘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두 제자가 나귀를 예수님께로 끌어오자 예수님은 나귀 새끼에 올라타셨다. 그리고 영광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마치 거리 축제, 거리 퍼레이드 같았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었고, 군중들은 겉옷을 길에 펴거나 나뭇가지를 길에 펼쳤다.
(21:7-8)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갑자기 어디서 군중들이 나타났을까? 마태, 마가복음에는 밝히지 않고 있지만 누가,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보았던 사람들이 예수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19: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요12:17-18)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군중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호산나를 외쳤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이다.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왕이심을 군중들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군중들은 불과 며칠이 지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을 살리기 위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참 아쉬운 장면이다.

본문에서 나귀를 드린 헌신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가, 요한복음을 종합해보면 가까운 이웃 동네인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만에 회생했을 때 그때 예수님을 믿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시신을 본래의 나사로로 회복시키셨다. 이 사람은 어쩌면 나사로의 가까운 지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귀를 드리겠다고 먼저 서원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의 삶이 주님 쓰시기에 알맞은 도구가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그저 흘러 가는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 번 만이라도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준비해야겠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섬길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나귀 주인의 그 행복이 오늘 우리의 행복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