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87]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27:32-44)
빌라도 총독의 사형언도가 있은 후 예수님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십자가 처형이 진행되었다.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처럼 직접 십자가 형틀을 어깨에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보통의 경우 십자가 세로 형틀은 이미 형장에 세워져 있고 가로 형틀만 죄수가 지고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휴식도 부족했고 잠도 주무시지 못했고 채찍맞음으로 인해 매우 지쳐 있었다. 그래서 때마침 옆을 지나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 형틀을 지게 했다. 이것은 자원함이 아니었고 시몬에게는 강제노역이었다.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으신 총독 관저에서 골고다 언덕까지의 거리는 약 800m이다. 이 길을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곧 아픔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골고다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자주 쓰러지자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던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이었다.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공중에 매달아 놓으면 못자국을 따라 피가 새어나가 죽게 된다.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일 주일씩이나 고통 당하고 숨이 끊어지기도 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우리를 위해 6시간을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것이다.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을 군병들은 지체없이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고 계시던 옷을 군병들은 서로 나누어 가졌다.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군병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에는 존경이나 배려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죄수일 뿐이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죄패를 붙였는데 마27:37, 막15:26, 눅23:38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고, 요19:19절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으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죄패는 세 개의 언어인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고 말씀한다.
(요19:19-20)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 두 명도 그 좌우편에 함께 매달렸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치켜 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며 조롱했다.
(27:39-4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병행본문인 눅23장에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의 반응도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 마가복음에는 강도 두 사람 모두 예수님에게 욕을 했지만, 누가복음에는 우편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을 의인으로 인정하고 긍휼을 구했다고 말씀한다.
(눅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편에 달린 강도는 예수님이 의인이었음을 알았고,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믿고 고백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복잡해야 얻어지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다. 매우 심플(simple)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참된 지식을 갖고 믿음을 갖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편의 강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절차가 매우 단순함을 알게 한다.
또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염려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따라오는 무리들을 돌아보시며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신다.
(눅23:27-28)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위로가 필요하고 눈물 흘려주는 사람들이 필요할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십자가에서 두 가지 모습(double image)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먼저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독생자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십자가에서 모든 형벌을 청산해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해야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백성들을 염려하신 주님의 그 사랑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찬양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