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목사의 {기적을 말하다} 시리즈 24
김상용목사의 {기적을 말하다} 시리즈 24
[24]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요9:1-12)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 하다가 위골되었다. 허벅지 관절 뼈가 어긋나서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밧단아람 외갓집까지 단숨에 달려갔던 야곱이지만 이제 20년 만에 귀향을 목전에 두고 하체가 불편한 지체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년 전 풀지 못한 한(恨) 때문에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치기 위해 와서 보니 야곱은 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에서의 분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이미 죄값을 치른 것으로 보였다. 형제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고 이렇게 화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야곱이 갖게 된 장애는 저주가 아니었고 은혜였던 것이다.
육신의 장애 때문에 불편해 하고 고통 가운데 지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저주라고 단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불편함이라 여기고 살아가면 좋겠다.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것 같아 송구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할 어떠한 일도 세상에는 없다고 믿는다.
본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세상을 본 적이 없어서 머릿 속에 어떤 이미지도 생성되어 있지 않았다. 백지 상태이다.
그나마 중도에 실명한 사람들은 사물들의 이미지들이 저장되어 있어서 위험으로부터 그나마 예측이 가능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들은 그들 안에 어떤 이미지 자료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더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
유대사회에서 육신의 장애는 죄의 결과로 인식했다. 그래서 본문에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누구의 죄로 인해 맹인이 되었는지 주님께 질문한다. 제자들은 부모 혹은 본인의 죄 때문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요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부모나 맹인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기 때문이라며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맹인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셨다.
(요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 맹인이 당황했을 것은 분명하다. 침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자기 눈에 큰 진흙 덩어리가 붙여졌기 때문이다. 앞을 못 본다고 내 얼굴에 장난치는 것인가? 순간 감정이 끓어 올랐을 수도 있다. 열등감 혹은 모욕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앞을 못보는 사람에게는 이 또한 어려운 요구이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또 가서 씻었다고 낫는다는 보장도 없다. 아무튼 그에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의심을 내던져 버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다. 그리고 앞을 보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후5:17).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맹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에 보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실로암 연못에 능력이 있어서 치유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에는 해답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다. 이미 흉년의 한복판에서 과부는 양식이 떨어져 죽을 날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한 끼 분량도 안되는 한 줌의 밀가루만 남아 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의 방문을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선지자를 섬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기로 한다. 한 줌의 가루로 떡을 만들어 선지자를 대접했다. 그랬더니 흉년이 다 지나기까지 삼년 육개월 동안 통의 가루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17:15-16)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실 때에는 과부의 가정을 거덜내기 위함이 아니라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는 문둥병(나병)을 치유받기 위해 찾아온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만나주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담그라고 명령한다. 나아만은 매우 불쾌했지만 수행원들의 권유에 못이겨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랬더니 피부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되었다. 상식적으로는 불합리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에는 문제해결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왕하5: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치유의 은혜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으로 영적인 불신을 떨쳐버리고 순종하여 나아가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에 가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시험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시험을 이겨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도착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준비된 숫양을 발견하게 하셨다.
(창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여호와이레, 주님께서 보내신 곳에 답이 있다. 주님 보내신 곳에 은혜가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예비된 은혜가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기쁨으로 순종하면 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순종은 불편하거나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영적인 혜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