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아내의 미모 때문에 위기를 만난 아브라함'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3
[3] 아내의 미모 때문에 위기를 만난 아브라함
아브라함,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른다. 그렇다고 아브라함 이전에 믿음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도 있고, 방주 제작자였던 노아도 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노아에게 제작을 위임했다. 그리고 노아에게는 방주 제작에 동참했던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찌되었건 노아는 새 시대를 열었던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홍수 심판에 죽고 유일하게 생존한 가정이 노아의 가정이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창9장의 노아의 족보를 보면 노아는 950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이 족보를 잘 살펴보면 노아가 죽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58세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손이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나이 차이는 892년이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이다. 갈대아 우르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데라는 어느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한다. 그래서 아들인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와 손주인 롯을 데리고 떠났다. 그리고 데라는 중간 기착지(middle stopover)인 하란에 도착한 후 그곳에 정착해 살다가 205세에 죽었다.
데라가 왜 평생 살았던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상의 땅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75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145세였다.
아브라함은 늙은 아버지를 두고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연로한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는 민족을 세울 계획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일에 아브라함이 선택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와 조카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세겜 땅에 도착했을 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창12:7).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자 애쓰고 있을 무렵 그 땅에 큰 기근이 찾아왔다. 정착을 위해 땀을 흘리던 아브라함은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간의 토지 개간 같은 정착을 위한 노력들이 허사가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름진 애굽 땅으로 내려가기로 뜻을 정한다. 기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애굽땅 입구에서 불현듯 불길한 상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다름 아니라 애굽 사람들이 아내 사라의 미모를 보고 탐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부탁한다. 자기가 남편인 것을 알게 되면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 갈 수 있으니 친오빠로 불러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이 남자 망신 혼자 다 시켰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였다(창12:11-13).
그런데 정말 예상했던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애굽 남자들이 사라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세상 말로 뿅갔다. 이것은 보통 남자들만의 반응이 아니었고 애굽 왕실의 관리들조차 사라의 미모에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 왕에게까지 사라의 미모를 자랑했다.
애굽왕은 사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낙타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사라의 나이는 최소 60대 후반이었다. 60대 후반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어쩌면 애굽왕 보다 한참 연상녀일 수도 있었다.
아브라함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당당하게 자기 아내라고 밝히고 죽임 당할까? 비겁하지만 이렇게라도 살아남을까? 결국 아브라함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애굽의 바로왕은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갔다. 사라가 남편있는 유부녀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왕실 예법대로 사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자 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12:17).
어떤 재앙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왕이 식겁할 정도의 따끔한 재앙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가 남편있는 몸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로왕은 아브라함을 불러다가 질책한다. 사라 때문에 자기가 웃음거리가 되었다며 화를 냈다.
그러나 바로왕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벌을 내릴 수 없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매운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순순히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짧은 애굽살이는 끝이 나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가나안에 돌아왔지만 다행히 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바로왕이 사라의 일 때문에 위자료가 아닌 위로금 명목으로 제법 많은 재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처 뿐인 영광이라고 했던가? 아브라함은 비록 재물을 얻어 돌아오기는 했지만 가족들 앞에서 면목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는 오명도 뒤집어 써야 했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크게 실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났으면 아브라함의 허물은 덮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창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족들을 이끌고 그랄 땅에 올라갔다가 아비멜렉왕에게 또 한번 부인 사라를 빼앗기고 만다. 애굽땅에서의 일과 비슷하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역사로 부인을 되찾아오고 사건은 종결된다(창20:2-3).
아브라함에게 억울함이 있을까?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아내 사라가 너무 예쁜 탓이라고 발 뺌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남자들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못난 남자이다. 자기 아내를 지키지 못하고 번번이 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이제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첫 걸음을 뗀 것 뿐이다. 이렇게 아장아장 걷다보면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설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창22장에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원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부족함 때문에 너무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머지않아 우뚝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은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거듭된 작은 실패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안되겠지만 아브라함은 너무 예쁜 아내 덕분에 신앙훈련을 빡세게 받은 경우가 아닐까? 우리는 부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목숨이 간당간당 했던 아브라함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걸음 한걸음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겠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걸음은 결코 실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 걸음마다 기도가 묻어 있어야 승리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