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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홍해 바다 속에 길이 있다'

문학n천국 2022. 2. 24. 19:02

김상용목사의 신앙에세이 {삶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라} 9

[9] 홍해 바다 속에 길이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민족이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周知의 事實, judicial notice)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애굽의 바로왕으로부터 해방을 승인받았다. 합법적으로 그 땅에서 탈출(출애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광복절이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 곧 유월절이다.

이스라엘은 애굽 국경만 넘어서면 끝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홍해 바다라는 장애물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홍해 바다는 플랑크톤에 의해 붉게 보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가장 낮은 곳의 수심이 300m이며, 폭은 10km가 넘는다. 거의 63빌딩 높이의 물 기둥이 양쪽에 벽이 되었고 그 사이로 백성들이 통과한 것이다.

얼마나 장엄한 장면인가? 백성들은 새벽녘에 세 시간 남짓 그 거대한 물 벽 사이로 통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굽 군대는 수심 300m의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수영복 입은 수영선수라도 10km를 헤엄으로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갑옷이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은 더욱 빠져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통과하며 신앙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여호와 신앙이 있으면 넘어설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뒤로 돌려 홍해를 건너기 전,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애굽 군대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혼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모세의 열 가지 재앙으로 모두가 당당하게 걸어서 나왔는데 얼마 못 가서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백성 중에는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는게 낫다며 광야에서 죽게 된 것에 불평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출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백성들의 불평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홍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라 장애물이라고만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세마저도 깊은 바다 속에 길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와 친히 싸워 물리쳐 주실 줄로만 알았다.

(출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오늘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분명 도우실텐데 우리가 경험한 범주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부분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홍해 깊은 바다 속에 예비된 길이 있다' 는 사실은 분명 우리에게 용기를 얻게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더라도 이 고통 속에 길, 곧 해답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좌절에서 일으켜 세워 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 바다는 장애물이 아니라 빠르고 안전한 지름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출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야곱의 유약한 아들이었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현실적인 길이 있었을까? 아니다. 결코 없었다. 요셉은 유대인이었고 애굽은 천하를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 유대인이 애굽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 자체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취득했다 해도 말단 지방 공무원이면 모를까, 제국을 다스릴 총리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상이었다. 다시말해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방법을 알고 계셨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무모해 보이지만 가장 쉬운 길이었다. 하나님은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이끌어 가셨다. 물론 천하디 천한 노예 신분이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 열 일곱 살에 노예로 팔려와 어느덧 서른 살이 되었다.

기회가 왔다. 바로왕이 매우 괴로운 꿈을 꾸었으나 애굽 전국에 어떤 점쟁이도 무당도 해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해 주었다. 요셉의 꿈 해석에 만족한 바로왕은 최고의 지혜자를 만났다며 요셉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요셉은 죽기까지 80 여년간 명예로웠다.

요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첫 걸음은 애굽의 보디발의 집이었다. 노예로 팔려갈 때는 하나님도 원망하고 부모도 원망하고 형들도 원망했겠지만 그것이 지름길이었다. 노예에서 총리로 이것이 인생역전이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씀한다(딤전4:4). 노예로 팔려 가도 감사, 꿈을 해석해도 감사, 총리가 되어도 감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신다. 홍해와 같은 장애물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초대교회 시절 예루살렘 교회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는 유대교인 청년 사울이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 열성분자였다. 심지어는 이스라엘을 벗어나 수리아 땅에 있는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오기 위해 길을 갔다. 사울의 눈에는 예수는 이단이었다. 그래서 이단을 쫓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메섹에 거의 다가갈 무렵 밝은 빛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만 거꾸러지고 말았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앞에 그는 망연자실 하고 말았다. 이 순간이 사울에게는 인생 전환점(a turning point)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울은 예수의 핍박자가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더이상 교회의 핍박자가 아니라 교회 개척과 부흥의 주체가 되었다.

우리 앞에 홍해 바다가 있더라도, 우리 앞에 나를 괴롭게 하는 사울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안에 인생역전의 신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내 발목을 잡던 문제가 오히려 나를 명예롭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최선의 길을 가고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지나고 보니 은혜였다 라고 고백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은혜라고 확신있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찬송가 373장 2절의 가사를 참 좋아한다. 지난 이십여 년 어려운 길을 걸어 오면서 늘 고백했던 구절이기 때문이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홍해바다 깊은 곳에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