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산책 1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14)
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1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7:13-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이 험하고, 좁은 문을 통과하는 듯한 길이라야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다. 많이 갈등하고 자신을 극복해내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멸망의 길은 갈등할 필요가 없고 그냥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가면 되는 쉬운 길이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넓은 길이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넓은 길을 좋은 길로 여기고 그리로 들어간다고 하신다.
생명의 길은 자기를 배려하는 길이 아니다. 자신을 억제하고 채찍질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길이 생명의 길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나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길인 것이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애굽 바로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젊은 노예인 요셉을 유혹했다. 단순한 호감이 아닌 성적인 도구로 삼고자 했다. 보디발의 아내는 젊고 잘생긴 요셉을 보며 성적인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성경의 기록대로 하면 날마다 동침을 요구했다고 한다.
(창39: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만약 요셉이 여주인의 요청을 받아들여 날마다 성적인 쾌락을 선물했다면 여주인은 요셉을 특별대우 했을 것이다. 어쩌면 노예의 족쇄를 풀어 주었을 것이다. 보통 평범한 남자였다면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도 없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이라고 오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아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신뢰를 저버리고,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저버리는 악한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한 죄라고 생각했다.
(창39:8-9)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렇게 의롭게 판단하고 믿음으로 대처했지만 결과는 아주 나빴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성폭행 미수 혐의로 자기 남편에게 고발한 것이다. 보디발은 분노했다. 노예 따위가 자기 부인의 몸을 만져 수치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 정도면 노예는 죽임 당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보디발은 요셉을 자기 집에 있는 왕의 감옥에 가둔다. 그리고 잘못을 범해 그곳에 갇혀있는 왕의 고위급 신하들의 시중을 들게 한다.
이것은 요셉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 아내의 고발에 대해 약간의 의문을 가졌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보디발은 요셉에게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내의 체면도 세워주고, 요셉에 대한 신임도 유지하는 방법으로 왕의 감옥에 가두어 새로운 역할을 주었던 것 같다.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타났을 때 보디발의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왕 다음 가는 권력자, 자기 남편도 두려워 하는 총리가 되어 나타난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아마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보디발 역시 과거의 무례함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을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하는 삶이다. 불편하지만 행복한 삶이다. 우리는 멸망으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좁은 문을 지나 생명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