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산책 20. 머리 둘 곳이 없다 (마8:18-22)
김상용목사의 {마태복음} 산책하기
[20] 머리 둘 곳이 없다 (8:18-22)
예수님께 한 율법학자(서기관)이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고백했다.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많은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트집을 잡으러 모여 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쉼을 필요로 한다. 여우도 하루를 마치고 쉬어야 할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지친 몸을 기댈 공간이 있다. 쉼이 없으면 다시 힘차게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고단한 영육을 눕힐 작은 공간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신다. 이 말은 정말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땅에서는 쉼 없이 복음사역을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 자신을 서기관인 네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느냐 라고 되물으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계속해서 걷는 길이다. 중간 어느 지점에서 정착하는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오래도록 머물 것처럼 착각하고 이 땅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은 아방궁이라는 화려한 궁궐을 짓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만리장성을 쌓아 외침을 막으려 했다. 불로초를 찾아 수 백년을 살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허사로 돌아갔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안식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이 땅에 영원토록 머물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늘 나라로 가는 길에 한 순간도 목적을 내려놓고 쉼을 갖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우에게 굴은 행복이다. 가족과 오롯이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에게 집은 안전하고 평안한 유일한 공간이다. 오늘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좋은 아파트? 그림같은 주택?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안식은 저 하늘에 예비되어 있다. 그곳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지금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뒤따라 가보면 날짜와 구역을 정해 놓으신게 아니다. 그저 쉼 없이 길을 따라 가며 일하셨다.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선포하셨다. 어느 한 곳에 기대어 머물지 않으셨다. 정말 머리 둘 곳 없는 여행자처럼 살아가셨다.
그리고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연로하니 돌아가신 다음에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지금은 아버지를 봉양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천국복음이 아닌 세상 일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 다시말해 영적으로 사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위임하고 너는 복음에 헌신하라는 말씀이다. 느슨해지면 안되는게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 다하고, 사람 다 섬기고 나면 그때는 주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9장에는 더 쉽게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눅9:61-62)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가족을 섬기는 일에 매였거나, 세상을 섬기는 일에 매인 사람을 주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라고 비유하신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나중에(after), 다음에(next) 라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now), 당장(right now) 손에 복음의 쟁기를 붙잡고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