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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말을 하라

문학n천국 2023. 5. 29. 14:25

김상용목사의 <잠언서> 에세이
{ 솔로몬에게 듣는.. 인생 사용 설명서 }

[22]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말을 하라

(잠언 24: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렸던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是'와 '非' 두 자(字)만 사용해서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한 시(詩)가 있다.

是是非非非是是(시시비비비시시)是非非是非非是(시비비시비비시)是非非是是非非(시비비시시비비)是是非非是是非(시시비비시시비)

이 시(詩)의 풀이는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도 옳지 않을 때가 있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도 옳지 않을 때가 있다.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도 다 그른 것이 아니며,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하는 것 이게 시비거리다'

이 시(詩)를 통해 방랑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넌 틀리고, 난 맞다는 걸 증명한다 해도 상대방을 떠나 보낸다면 무슨 이득인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맞다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는 것이다.

(야고보서 3:1-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중요한 것은 말(言)이 아니라 사람( 人)이다. 그래서 사람을 떠나가게 하는 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람을 불러들이고, 변화를 주고, 사람을 살게 하는 말을 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을 잃음으로써 얻는 유익함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김삿갓의 풍자시(諷刺詩)에는 사람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의 고민이 배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이 끌려왔다. 유대교 율법에 따라 판결하면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었다. 이제 이 여인의 목숨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좌우될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만약 예수님이 '법대로 하라' 고 말씀하시면 여인은 곧 돌에 맞아 죽게 된다.

(요한복음 8:2-5)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 무언가를 쓰신다. 무슨 내용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여인을 고소한 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다.

(요한복음 8:6b-7,9)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여인을 율법으로 판단하면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살리셨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고 권면하신 후 여인을 돌려 보내셨다. 여인에게 다시 새 삶을 얻게 하신 것이다. 그 이후 여인의 삶을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죄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요한복음 8: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에 대해 눈을 감으신 게 아니다. 그 여인의 죄를 지적하시되 그녀를 고소한 유대인들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조용히 물러갔다. 결국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살리시고, 유대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그들 또한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임을 알게 하신 것이다.

어느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마을인 베다니에 가셨다. 유족인 두 여동생 곧 마르다와 마리아는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에 굴을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를 큰 돌로 막는 방법이다. 여동생 마르다는 무덤 문을 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냄새가 난다며 예수님을 막고자 한다.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어 부패한 냄새가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게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고 외치신다. 그러자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다. 말 한마디의 기적이다.

(요한복음 11:43-44)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오늘 나의 말(言)은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떠나가게 하는가?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도록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 간음한 여인도, 죽은 나사로도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삶을 얻었다.

천주교에는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바치는 ‘내 탓이오’ 라는 고백의 기도가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라고 먼저 고백하고 가슴을 세 번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며 고백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자기 허물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행위이다. 이 얼마나 겸손한 시도인가?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 때에 부부지간에 '내 탓이오'를 말하지 않고 '네 탓이오'를 외쳤다. 남편은 아내 탓으로 그리고 아내는 뱀 탓으로 돌렸다. 짐작이지만 이 일만 놓고 보면 아담과 하와 부부는 서로에게 애정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혼자 다 뒤집어 쓰려고 했을텐데 말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지켜주려 노력하지 않았다. 백점 짜리 부부는 못되었다.

(창세기 3:11b-13)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남을 탓하는 동안 이웃과의 관계는 발전할 수 없다. 남편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동료이든 서로를 탓하기에 바쁘면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남을 탓하는 말은 좋은 언어 습관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중국 청나라 때 안지추(安之推)란 정승은 자신의 가훈 십조를 통해 '잘된 일은 반드시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은 반드시 내 탓으로 돌리라' 는 당부를 후손들에게 남겼다고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에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다.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바른 말 해 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 라고 번역해 놓았다. 여기서 바른 말은 남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삶을 참되게 해석하고 그 길을 제시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런 사람이 참 이웃이고 친구인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외면하고 지나가고, 어떤 이들은 동전 몇 푼을 던져주고 지나갔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더니 동전 통을 채워달라는 무언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다가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순간 앉은뱅이는 치유되었고 일어서서 걷게 되었다. 앉은뱅이는 예수를 원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이름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베드로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려고 고민해야 한다. 그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도행전 3:1-2, 5-8 )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우리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스데반집사는 순교 직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선언했다. 이는 유대인들의 '화를 돋우는(mad)' 말이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이 자신에게 빗발치듯 날아들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사도행전 7:56,59-60)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는 '하고 싶은 말' 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말'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야 할 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면 오늘 나의 말을 통해 주님께서 일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