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19]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부제: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곳, 베데스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말은 '체리를 딴다'는 사전적인 의미 외에 탐스럽게 잘 익은 체리만 따고, 나머지는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말해 좋은 것만 선별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것을 말한다. 1등만 살아남는 현대의 경쟁사회를 비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등만 행복하고 2등을 비롯한 나머지 모두가 불행하다면 아마도 거기는 공산당 세상일 것이다. 백두혈통(白頭血統, Kim Family)을 자랑하는 북쪽의 치즈 마니아(Cheese Mania) 김아무개만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라는 제목의 영화가 1989년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1986년 당시 전교 1등을 하던 한 여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는데 그 유서 내용을 기반으로 한 실화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영화는 1986년 1월 15일 새벽,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S사대부중 3년생인 O양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O양은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으로 당시 신문에 공개된 여학생의 유서는 입시 과열로 치닫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난 1등 같은 건 싫은데,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나에게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 분이 날 15년 동안 키워준 사랑하는 엄마라니 너무나 모순이다....'
O양의 유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을 비판하면서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임정진의 소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가 출간되어 당시 중고생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강우석감독의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가 개봉되었다.
요즘엔 '여성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성형수술 순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렇다. 행복이 중요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행복한지를 묻고, 행복해지려 고군분투 하는 것 같다. 행복하지 않다면 인생은 그저 인고(忍苦)의 세월일 뿐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근래 출간된 <아프리카의 빨간 지붕 병원>(2023)이라는 책이 있다. 나이지리아의 이재혁 의료선교사가 지은 책이다. 그는 2010년 평범한 외과의사의 삶을 뒤로 하고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안양샘병원 외과 과장이었다.
그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빨간 지붕 병원'으로 불리는 빙햄 병원(Bingham Hospital)을 섬기고 있다. 예고 없이 터지는 이슬람의 테러와 종교 갈등으로 숱한 생명이 한순간에 스러지는 곳에서 13년째 외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고백한다.
이재혁 선교사는 본래 중증 근무력증(Myasthenia gravis)을 앓던 사람이었다. 중증 근무력증은 신경의 자극이 근육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서 근육이 쉽게 피로해지는 질환이다. 이 질환의 첫 증상은 한쪽 눈꺼풀이 내려오는 안검하수(눈꺼풀처짐증)가 나타나고, 또 사물이 두 개로 보이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음식물을 삼키기 어렵고, 팔다리가 약해져 걷는 모습까지 달라진다고 한다. 죽음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그는 늘 새벽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남들이야 어찌 여기던 가장 행복한 삶을 찾아 나이지리아로 떠난 것이다.
행복과 즐거움이 삶의 보상일까? 이게 없으면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뭐든 하려 든다.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8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 중에 양문(Sheep Gate)이 있었는데 구약시대부터 이 근처에 양이나 염소 등을 파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성전제사에 바쳐질 양들이 이 문을 통해 들어갔기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양문 안쪽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다.
베데스다(Bethesda)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의 저수지이다. 기드론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다가 이곳에 저장했는데 그 물로 제물을 씻거나 성전에서 사용했다. 베데스다는 '물 저장탱크' 라 할 수 있다. 베데스다의 크기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가로 110m, 세로 80m, 깊이 13m정도였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어 질병 치유를 구하는 장소였는데 이것은 전설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5:2-5)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성경 본문에서 꺽쇠([ ])로 묶어둔 내용은 이 본문이 어떤 성경 사본에는 있고, 어떤 성경 사본에는 없어서 최초의 성경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표식이다. 다시말해 병자들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었던 것은 천사가 가끔 내려와 병을 치료한다는 전설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면 병이 나았다는 전례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꺽쇠 안에 있는 본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천사는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들에게 1등만 치료해 준다는 경쟁을 붙인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인정없는 매몰찬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 사람만 치료해 줄테니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물 속에 몸을 던져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세였다고 한다. 그런고로 거기 있던 38년 된 병자는 평생을 병마와 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기준 CIA가 조사한 세계 각국의 평균수명 데이터가 있다. 1위는 모나코로 89.7세, 2위는 일본으로 84.4세, 3위는 한국으로 83세였다, 4위는 스위스로 82.4세....프랑스는 13위로 81.2세였다...독일은 27위로 80세였고,미국은 47위로 77.6세였다.
불과 200 여년 전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어땠을까? 서울대 의대 황상익교수가 한국 근현대의학사를 연구하여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 평민들의 평균수명은 35세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은 46세였다. 물론 영조대왕이나 태조 이성계처럼 장수한 왕도 간혹 있었다. 이렇게 수명이 짧으니 우리 조상들은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열 살 전후의 나이에 꼬마 신랑, 꼬마 신부가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38년된 병자, 곧 온 인생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요한복음 5:5~9)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이것을 은혜라고 칭한다. 그 사람이 치유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고침받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이겨서 자격을 얻은 게 아니었다. 베데스다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중증환자이다. 이들에게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것이다.
그곳에 모인 환자들은 전설을 따라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가 가장 먼저 연못에 퐁당 뛰어든 사람만 치유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깊은 잠을 잘 수도 없고, 화장실도 자주 갈 수 없고, 음식도 편하게 먹을 수 없다. 왜냐면 그 잠깐 사이에 물이 움직이면 남들보다 앞서 연못에 퐁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옆 사람도 적이나 다름없고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도 불가했다. 서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보시는 세상은 이렇게 살벌한 기운이 감도는 세상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곳에 모인 환자들은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설대로 된다면 어쩌다 단 한 사람만 치유되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굉장히 지루하고 피 말리는 대기상태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전설이다보니 이곳에서 치유받았다며 와서 간증하는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막연한 희망에 인생을 건 이들의 고달픈 하루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38년 된 병자였던 사람만은 이제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성전에 가야, 교회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클럽이 아닌, 술집이 아닌, 죄 짓는 자리가 아닌 교회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참 축복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이렇게 중증 환자들로 가득했다. 바꾸어 말하면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왔지만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곧 38년 된 병자만 행복해졌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는 행복주택이 아니다. 여러가지 고난으로 인해 인생이 피곤하며 흔들다리 위를 걷는 것과 같다. 흔들다리 위에 있는 한 쉼은 없다. 이 흔들다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 뿐이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시고 치유하시는 목적은 분명하다. 사망의 자리에서,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로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엡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