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 고립된 자를 구해내라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20] 고립된 자를 구해내라
1954년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대(大)작가 헤밍웨이는 1961년 자살하고 말았다. 온 세계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대작가가 스스로 생(生)을 마감해 버렸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filament)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대작가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의 가정은 4대가 우울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1928년 엽총으로 자살했다. 당시 헤밍웨이는 이십 대 후반이었고 그도 말년으로 갈수록 우울증과 알콜 중독, 망상에 시달렸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아버지의 자살을 원망하면서도 그도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집에서 엽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이후 그의 자손들도 자살행렬에 합류해 모두 7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대작(大作)을 남겼다.
이병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전 한림대 교수)는 역사적인 인물의 전기와 작품 등을 참고해 정신병리 증세를 추론(推論,Reasoning)했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와 역사적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정신과적(精神科的)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물리학(物理學)에 탄성한계(彈性限界, elastic limit)라는 개념이 있다. 금속 같은 고체를 힘을 주어 당기면 늘어났다가 힘을 빼면 다시 복원되는데 여기서 힘을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복원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복원될 수 있는 범위를 가리켜 탄성한계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한계치를 넘어가면 복원되지 않고 늘어난 채로 남게 되는데 이런 현상을 영구변형(永久變形)이라 한다. 예를 들어 용수철을 힘을 주어 당기면 늘어났다가 놓으면 다시 복원된다. 그런데 탄성 한계를 벗어날 만큼 힘을 너무 세게 주면 늘어난 것이 복원되지 않는 영구변형이 된다. 또한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늘어났다가 잡아당긴 손을 놓으면 탄성에 의해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너무 세게 잡아 당기면 끊어져 영구변형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탄성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이나 상처가 너무 커서 지나치면 거기서 회복되지 못하고 영구변형, 곧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회복력을 넘어선 아픔과 고통을 겪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보이는 것이다.
1945년 4월 30일은 유대인 육백 만 명을 포함해 무고한 시민 천 백만 명을 살해하고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넣은 독재자 히틀러(Adolf Hitler)가 자살한 날이다. 당시 56세의 히틀러는 독일 베를린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불과 40시간 만에 곧 이틀 만에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고, 에바 브라운은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마시고 자살했다.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패전(敗戰)이 확실해지자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히틀러는 천 백만 명을 살해한 죄 값을 감당키 어려웠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헤밍웨이와 히틀러의 자살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연약한 것이 우리 인간이다.
구약성경 엘리야 시대에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던 사르밧 과부는 극심한 흉년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아들과 마지막 한 끼를 먹고 죽을 결심을 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떡 한 조각을 부탁했을 때 과부의 대답이다.
(열왕기상 17: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 과부처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외로운 상황을 고립무원(孤立無援, No man is an island)이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극단적인 선택을 염두에 두는(keep in mind)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현명하지 않다. 목숨을 끊어서 해결될 일은 없다. 이제까지의 시간들이 잘못되었다면 속히 돌이키고,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하나님께서만 주신다.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부는 마지막 밀가루 한 움큼으로 작은 떡을 만들어 선지자를 대접했고 흉년이 지나기까지 집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흉년의 기간은 삼년 육개월이었다(약5:17).
(열왕기상 17:14-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탄성한계 곧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나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나를 살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다. 이 사실만 잊지 않으면 언제든 희망은 있다. 비록 큰 실수를 했어도, 죄를 범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죽는 순간까지 삶은 현재진행형(be + ~ing)이다. 언제든 돌이킬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It’s going to be done when it’s done).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한 두 명의 강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낙원 곧 천국에 들어갔다. 십자가에 달린 순간에도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다. 결국 그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파(A)와 오메가(Ω) 곧 시작과 마침이 되신다.
(누가복음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the First and the Last, the Beginning and the End)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불륜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여인은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유대인들에게 끌려왔다. 아마도 고대 유대사회에서 이런 일은 무관용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모세 율법이 정죄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죄란 것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다.
(신명기 22:22-24a)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여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끌려 오면서 침뱉음을 당하고, 손바닥으로 따귀를 맞고, 집어던진 물건에 몸이 상처났을 수도 있고,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받았을 것이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8:3-6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이들의 목적은 어찌하든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반유대적 인물로 낙인찍고자 함이었다. 여자는 어차피 돌에 맞아 죽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예수님까지 궁지에 빠뜨릴 심산(心算)이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이들은 참 비열한 것 같다. 나 살겠다고, 우리 조직을 살리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공격을 퍼부어댄다. 사실 이 여인과 예수님은 아무 관련이 없다. 많고 많은 이스라엘 여인 중에 한 여인이 간음한 것이고 자기네 율법대로 처분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야 말겠다는 저의(底意)가 미심쩍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굳이 민초(民草)의 뜻을 묻겠다고 찾아온 정치인같다. 또 하나 여인과 불륜한 상대 남성은 어디에 있는가? 왜 남성은 끌고 오지 않았는가? 그도 동일한 죄를 범했는데 말이다. 유대인들의 진심이 의심받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없이 땅에 무언가를 쓰신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은 질문 공세를 계속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신다.
(요한복음 8:6b-8)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율법을 지키는 것은 타당하되 그러나 죄인이 아닌 자가 돌을 던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너무 지당(至當)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슬그머니 현장을 떠나고 만다. 이제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다. 이로써 여인은 죽지 않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의문의 1패(a mysterious defeat)를 당하고 물러갔다. 요즘 말로 1타 2피(one shot two kill)이다.
(요한복음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며 돌려 보내신다.
(요한복음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여인을 그냥 두었으면 분명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다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벼랑 끝에서 건짐받았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게 된 사람,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을 살펴 구해내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복음이고 또한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기보다 새로운 기회를 얻게 하셨다.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우리도 기회를 얻게 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