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앙에세이 - 인간관계를 리뉴얼 하라

문학n천국 2023. 11. 24. 16:33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성경을 벤치마킹(bench marking) 하라 >

[21] 인간관계를 리뉴얼(renewal,개선) 하라

인간관계의 원리 중에 <1:2:7의 법칙>이 있다. 이것은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나를 좋아하고, 두 명은 날 싫어하며, 일곱 명은 내게 관심이 없다' 는 의미이다.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본래 유대교 교리에서 나왔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비판한다. 당신을 싫어하고 당신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열 명 중 두 사람은 당신과 좋은 벗이 된다. 남은 일곱 명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다'. 일명 <2:1:7의 법칙>이다.

하지만 윤대현교수는 수많은 상담 사례들을 종합해 <1:2:7의 법칙>을 주장한다. 우리 스스로는 썩 괜챦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사실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 법칙은 보여준다. 사실 우리에게도 괜히 싫은 사람이 있고, 이유도 없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사람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날 좋아할 사람과 싫어할 사람과 무관심할 사람은 1:2:7의 비율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누구에게 집중할 것인가는 분명하다. 내게 전혀 관심없는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집중할 것인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대부분 나를 싫어하거나 관심없는 사람에게 집중할 때 얻게 된다고 한다. 그런고로 나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이에게 집중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관계의 불문율(不文律, unwritten law)이 있는데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칭한다.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먼저 손 내미는 것과 먼저 따뜻함을 나누어 주는 것이 좋은 관계를 위한 지름길이다. 그러면 남도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고 마음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간관계 속에서 인맥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고,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ㄷ다.

나는 군복무를 마친 후 기독교 신앙에 귀의(歸依,become a believer)하면서 인간관계를 가지치기(pruning)했다. 과감하게 술과 유흥을 즐기는 친구들과 단절했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신앙 안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많이 형성해 왔다. 이것은 내게는 피할수 없는 선택이었다. 청년 때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목회자(牧會者)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아름드리(armful) 나무처럼 많은 가지와 나뭇잎을 등에 업고 있으면 그 자체로 고단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관계 가지치기를 해서 거의 벌거숭이 나무가 되었다.

성경에 다윗이 사울왕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쫓기던 때가 있었다. 다윗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백성들이 사울왕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린 후의 일이다. 사울왕의 질투와 미움을 받고 목숨까지 위태롭자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이스라엘 서남쪽 지역 아둘람 굴(The cave of Adullam)에 은신했다. 그리고 다윗의 소식을 들은 사백 여명이 다윗과 함께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곳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사울왕의 통치 하에서 고통받던 사람들이었다.

(사무엘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당시 이스라엘 인구가 이백 만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사백 명이면 1%는 커녕 0.02% 밖에 되지 않는 숫자이다. 다윗과 목숨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은 5천명 당 1명 꼴로 극소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다윗은 지경을 넓혀갔고 결국에는 사울왕이 전쟁 중 전사하자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다윗왕과 아들 솔로몬왕의 영광은 이렇게 미약함에서 시작되었다.

넓은 인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이라도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인생은 그걸로 충분하다. 인간관계 가지치기가 잘된 사람이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윗은 스스로 원한 건 아니었지만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가지치기가 되어 0.02%의 사람들로 성공을 일구어 냈다.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다윗에게 나아왔기 때문이다.

아담의 아들 가인(Cain)과 아벨(Abel) 사이에 살륙이 있었다. 이들은 피를 나눈 형제이다. 그러나 형 가인에 의해 동생 아벨은 살해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다는 이유였고 이것으로 인한 질투 혹은 분노 살인이다. 가인은 비정상(非正常)이었다.

(창세기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요셉(Joseph)은 어떠한가? 열 명이나 되는 이복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가는 노예상에게 은 이십에 팔려갔다. 남보다도 못한 핏줄들이다.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누추(陋醜)해 질 수 있을까?

(창세기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요셉은 노예로 팔려간 지 13년 만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요셉이 노예에서 최고권력자가 되기까지 그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요셉에게 진심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오롯이 자신만의 실력만으로 13년 만에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요셉의 실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된 꿈풀이와 지혜였다.

(창세기 41:38-41)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인간관계의 리뉴얼은 나를 위한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이발소나 과일가게의 전면 유리창에 리본 모양의 큰 종이에 <신장개업>이라고 써서 대각선 모양으로 붙여 놓았던 것을 기억한다. 주인이 바뀌었거나 가게가 새로워졌다는 알림이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도 신장개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까지는 1,600 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한다(B.C.2,456년경). 그리고 전 지구적인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 유일하게 노아의 가정만 구원하기로 정하셨다. 당대에 노아만 하나님 앞에 의로웠기 때문이다.

(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심판을 사전에 예고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니느웨성을 심판하고자 하셨을 때 요나 선지자를 보내 미리 재앙을 선포하셨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니느웨 백성들은 40일 전에 멸망을 고지받았다.

(요나서 3:3-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고지받은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회개했고 하나님은 예고된 심판을 거두셨다.

(요나서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뒤엎으실 때 노아 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신 것은 심판에 대한 뜻을 돌이키실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노아가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죄 용서를 구했고, 아브라함이 소돔 백성들의 죄 용서를 위해 간구한 것과 대조적이다.

(출애굽기 32:31-32)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창세기 18:23-24)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결국 세상은 40일의 대홍수로 끝이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죽었고 오직 노아의 가족 8명만 구원받았다.

(창세기 7:11-12,2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결국 중요한 것은 대홍수는 노아의 가족 8명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도우심이 있어 가능했다. 노아의 가족은 자신들의 목숨은 물론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쌍씩 살려냈다. 방주의 크기는 축구장 규모이다. 요즘처럼 기계화된 시대라면 제작 기간이 짧았을 것이나 그때는 말 그대로 아날로그(analog) 시대였다. 사소한 것까지도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창세기 6:15-16)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처음으로 돌아가서 너무 넓은 인간관계는 우리네 인생을 피곤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타이트(tight)하게 리뉴얼(renewal)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쓰실 만한 작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면 좋겠다.  '평생동안 가장 좋은 친구는 한 명이면 족하고, 두 명이면 너무 많고, 세 명은 불가능하다'는 작자 미상의 말이 있다. 명심보감( 明心寶鑑)에도 '평생 친구는 한 명이면 족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인간관계를 타이트하게 리뉴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