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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문학n천국 2024. 9. 9. 09:45

김상용목사의 인생에세이
{ 한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Live with one sentence a day) }

(37)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어느 여 기자가 26세 때 발목을 크게 다쳐 직장을 그만 두게 된다. 인생이 무너지는 좌절과 낙심이 찾아왔지만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 한 권을 쓰는데 무려 10년을 허비한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를 가지고 3년 동안 여러 출판사를 찾아 다녔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나중에는 원고가 다 해져 너덜너덜해졌다. 

어느 날 모 출판사 사장을 만나기 위해 그가 출장가는 시간에 맞춰 기차역에 쫓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사장님, 여행하시는 동안 이 원고를 딱 한 번만 읽어 주세요.” 하고 건넨다. 이런 일을 세 번 반복한 후, 그녀는 책을 출판하게 되는데 하루에 5만 부 씩 팔려나간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는 이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 해인 1937년 소설부문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s)을 수상한다. 1939년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개봉했다. 영화는 시대와 환율의 차이가 있지만 4억 달러 곧, 5천 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가는 마가렛 미첼(Margaret Mitchell, 1900-1949)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Scarlett O'Hara, 비비안 리 扮 )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고 말한다. 원래 대사는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이다. 해석하면 "결국,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을 맡은 영문학자 장왕록씨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로 번역한다. 이렇게 원문보다 번역이 더 나은 것을 '초월번역(supertranslate)'이라고 한다.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청된다. 마가렛 미첼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잘 되는 것 보다 잘 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상 일이 그런 걸 어찌하랴? 우리가 극복해야만 한다.

다음은 도종환(1954~) 시인의 <담쟁이> 라는 시(詩)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는 담이나 벽을 타고 뻗어나간다. 수평으로 자라면 편할텐데, 얘들은 힘들게 꼭 수직으로 올라간다. 상당히 피곤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삭막한 담벼락을 푸르게 색칠해 버린다. 담쟁이는 숨쉬는 담과 숨쉬는 벽이 되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특하기 그지없는 녀석들이다.

오늘의 내 수고가 무엇이든 그것이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고, 인류발전에 도움이 되길 소망하자.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향해 희망을 주는 마지막 잎새가 되기를 기도하자.

소설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 는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 1862-1910)가 19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마지막 잎새>는 폐렴으로 죽음을 앞둔 화가 지망생 존시의 이야기다.

“넝쿨의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지면 나도 떠나게 될 거야…”  존시(Johnsy)는 창밖의 담쟁이 넝쿨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삶을 비관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새도록 돌풍을 동반한 세찬 비가 쏟아진다. 그럼에도 다음날 창문 밖에는 담쟁이 덩굴 잎사귀 하나가 벽돌 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덩굴에 붙어 있는 마지막 잎새였다.

존시는 그 마지막 잎새를 보고 삶의 의욕을 되찾고 병세는 호전된다. 하지만 사실은 담쟁이 덩굴의 마지막 잎새는 이웃을 소중히 챙겨 오던 무명 화가 베이먼 노인이 존시를 위해 담벼락에 몰래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잎새를 그린 베어먼 노인은 폐렴을 앓아 얼마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마지막 잎새는 베어먼 노인이 평생 꿈꾸어온 걸작(傑作)이 되고 말았다. 또한 마지막 잎새는 사람을 살린 노인의 유작(遺作)이 되고 말았다.

신약성경에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이야기가 있다. 그는 앉은뱅이지만 생존을 위해 매일 구걸을 해야 했다. 사실 구걸이란게 당당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자존심이나 체면 같은건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야 가능한 일이다. 이 사람은 오랜 기간 그 일을 계속한 듯 당당하게 목(牧)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3:1-2)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마침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그가 들어왔다. 아마 이전에도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존재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베드로에게 앉은뱅이가 마음의 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앉은뱅이는 감동적인 적선(積善)을 생각하며 기대에 찬 얼굴로 베드로를 바라본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동전을 세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기대와 상관없이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 동전이 아닌 치유를 그에게 베푼다. 앉은뱅이는 그날 아침 출근길에도 구걸로 인한 수입만 생각했지, 선천적인 병을 치유받게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다.

(사도행전 3:6-8)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예수 그리스도는 그날 앉은뱅이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나 선물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 해도 상관없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은혜를 주신다. 그 날 앉은뱅이는 사십년 만에 걷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고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반드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오늘이 힘들어도 내일 만나게 될 은혜를 기대하며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한다.

(사도행전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16:30-31)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